| 성 프란치스코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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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수도원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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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베네딕트와 함께 수도회의 양대 산맥처럼 추앙받는 프란치스코가 태어나고 활동했던 이탈리아 아시시(Assisi)를 찾아가는 길은 멀었다.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서 내린 뒤 다시 2시간 30분 가량 고속도로를 달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수도원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기독교의 신은 멀리 하늘나라에 있었다. 신에게 다가가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었지만 하느님은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했다. 결국 하느님을 이해하는데 평생을 바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서기 3세기경부터 이집트를 중심으로 도시 외곽이나 외딴 곳, 동굴, 사막 등에 터를 잡고 금욕과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것이 수도원의 모티브가 됐고 이를 체계화한 것이 6세기 성 베네딕트 수도회였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500년이 넘게 유럽 수도원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규모가 커지고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귀족들이 아예 전 재산을 기부한 뒤 짐을 싸들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경우까지 나왔다. 11세기 유럽에서 가장 크고 유명했던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의 경우 작은 왕국을 방불케 한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방대한 영토를 소유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초기 수도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각성, 즉 수도회 운동이다. 유럽에서 7년째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서울대교구 허규 신부는 "그러면서 베네딕트 수도회의 울타리를 벗어난 수도회도 나타나게 된다"고 설명했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성으로 탄생한 수도회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13세기에 등장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다. 프란치스코(1181~1226)는 아시시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무소유'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아시시의 한 성당 앞을 지나다가 "그리스도 제자들은 금이나 은, 돈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 길을 떠날 때 식량자루도 돈지갑도 빵도 지팡이도 가져가서는 안되며 신발도 두 벌의 옷도 가져서는 안 되고…"라는 계시를 듣게 돼 나중에 이를 지침서로 삼아 수도회 운동을 벌이게 된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지향점은 "순종하며 소유 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살았던 모습처럼 살겠다는 것이고 부유한 베네딕트 수도회에 대한 암묵의 비판이기도 했다. '청빈''순결''순명'등 3대 정신을 수도 생활의 기초로 삼은'작은 형제회'(Ordo Fraturm Minorum)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공식명칭이다. 수도원 순례에 동행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신성근 신부는 "'작은 형제회'라는 말은 프란치스코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며 "'작음'과 '형제애'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삶이 그들의 목표점"이라고 설명했다. 아시시에서 만난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프란치스코 데 라자리 수사는 "우리의 삶은 다른 삶을 위해 봉헌돼야 한다는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베네딕트 성인이 수도원의 기초를 닦았다면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원의 철학을 몸과 삶으로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사들의 삶을 그린 영화 '위대한 침묵' 의 실제 배경이 됐던 프랑스의 생 피에르 샤르트뢰즈(saint pierre de chartreuse) 수도원 역시 이같은 수도원 운동의 산물이었다. 그르노블 지역 깊은 산 속에 자리잡은 이 수도원은 일반인의 출입을 막는 봉쇄(封鎖) 수도회로, 수도사들은 세상과 격리된 채 침묵하며 매일 한끼의 식사만으로 수도하는 금욕의 삶을 살고 있다.
독일에서 7년째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서울대교구 허규 신부는 "유럽의 수도원들은 역사속에서 이처럼 개혁과 세속화, 다시 개혁을 거듭하며 진화해왔다"고 말했다. 천주교주교회의 이정주 신부는 "18~19세기에는 다시 사막으로 들어가야 되느냐, 세상을 향해 나가야 되느냐를 놓고 큰 쇄신운동이 있었는데 요한 수도회(병자치료), 살레지오 수도회(청소년 교육) 등 다양한 활동 수도회가 탄생한 것도 그런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이 신부는 또"가톨릭 교회 2,000년의 역사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평생 신만을 사랑하며 영적인 삶을 살겠다던 수도원 속 수사들도 이 신부의 말처럼 다양한 형태로 그들의 신에게 이르는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