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미국과의 핵 등 무기감축 프로그램 중지 가능성을 경고하고 미국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할 경우 외교관계를 단절할 수 있다고 밝히는 등 크림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 간 힘겨루기가 지속되고 있다. 이와 별도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부 대표가 러시아의 크림반도 장악 이후 처음 만나 외교적 해법을 모색했다.
러시아 국방부 당국자는 8일(현지시간) 성명을 내 "자국에 대한 미국의 군축사찰 동결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미국은 지난 2010년 핵무기 폐기를 위한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을 체결했으며 2011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군시설 사찰 협정을 맺었다. 현지 언론은 이 당국자의 발언이 두 협정의 폐기도 가능하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이 당국자는 "미국이 최근 러시아와 군사협력을 중단했기 때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려는 것"이라며 "미국과 나토의 근거 없는 위협이 러시아를 불가항력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위협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주둔병력 증파도 이뤄졌다. 번호판이 없는 러시아군 차량 60여대가 크림자치공화국 수도 심페로폴로 이동했으며 러시아군 기지에는 군용차량 200여대가 군함으로 운반됐다. 크림반도에 주둔 중인 러시아군도 이날 우크라이나 국경수비대 병력 일부를 억류했다가 석방했으며 국경을 지나는 페리를 검색하려는 우크라이나 국경수비대를 제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압박도 이어지고 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이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의 전화통화에서 "크림반도를 합병할 경우 외교적 통로는 완전히 봉쇄될 것"이라며 양국 간 외교단절까지 암시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이날 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 및 발트 3국 등 6개국 정상과 연쇄 전화 회담을 통해 사태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통화 후 성명에서 "러시아가 긴장상황을 완화하지 않을 경우 '새로운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지만 조치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처럼 서방과 러시아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크림반도 장악 이후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 그레고리 카라신 외무차관과 블라디미르 옐첸코 주러시아 우크라이나 대사가 이날 만나 양국 간 문제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 실각 이후 들어선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양측 정부 간 만남은 이례적이다.
안드리 데시차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작지만 확실한 진전이 있었으며 평화적 방법으로 상황을 관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진전'의 의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러시아 외무부 역시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뤄졌다고 밝혔지만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과 관련한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전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임시정부를 인정한 것은 아니라서 외교적 해결과정은 험난하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의 거부이유 중 하나인 극우파가 여전히 야권에서 일정한 지분을 행사하는 것도 문제로 불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액화천연가스(LNG) 수출을 검토하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9일 보도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유럽의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윌리엄 번스 미 국무부 부장관은 "정부 내에서 협의 중인 것은 확실하다"고 밝혔다. 존 베이너 하원의장도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에서 미국산 천연가스 생산 및 수출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행 미국 법률상 미국에서 생산된 천연가스는 예외적 상황을 빼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로만 자유로이 수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