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효·형평성에 문제… 자율역행 지적/“기업 부도도미노 공포 희석” 기대감부도유예협약에 이어 또 하나의 괴물이 탄생하게됐다.
「기업부도 방지를 위한 은행간 협조융자 시스템」이란 새로운 자율협약이 만들어질 것이란 소식을 접한 금융계는 즉각 이에 대해 「부도봉쇄협약」 또는 「부도금지협약」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시장경제」나 「금융자율」의 근본원리를 깨뜨린다는 부정적 평가를 바탕에 깔고 있다.
강경식 부총리가 21일 은행장 23명을 모아놓고 사실상 제안한 협조융자협약(가칭)은 『더이상 쓰러지는 기업이 나와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도출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버티고 있는 기업들은 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게 아니냐』는게 재경원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부도유예를 통해 회생한 기업이 하나도 없으니 부도유예로 가는 길마저 막아보겠다는게 협조융자협약의 발상 배경이다. 이제 상업, 조흥,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 선발 시중은행과 신한, 외환, 산업은행 등 8개은행 실무진들이 모여 일주일내 구체적인 협조융자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간사은행인 상업은행은 곧 회의를 소집, 기업정보 공유체제, 협조융자대상 기업의 규모, 융자방법 등을 포함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지만 그 내용은 이미 시행중인 부도유예협약대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협조융자협약에 대한 금융계의 첫 반응은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어려운 시장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택한 아이디어여서 우선 연말까지만 버텨보자는 미봉책정도로 해석하고 있다.
기업의 흑자도산을 막기위한 금융기관 협약이 제기능을 할 경우 일단 당장은 금융시스템의 안정에 보탬이 될 전망이다. 최소한 부도도미노에 대한 공포는 상당부분 희석시킬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문제는 이 처방이 금융기관의 책임경영 원칙에 어긋난다는 데 있다.
윤증현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은 『자율협약은 시장경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며 논리의 자체모순이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강부총리는 이날 은행장들에 『금융기관 부실의 책임은 전적으로 금융기관들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업부도를 막기위해 조건을 달지말고 돈을 빌려주라』고 은행들에 요구했다. 이자리에서 당장 은행장들이 『돈을 빌려주라는 얘긴지, 말라는 얘긴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음은 물론이다. 자율과 시장경제를 외쳐온 재경원이 쓰러지는 기업이 나와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펴는 모순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평가들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은행권의 자금지원만으로 기업이 부도를 면할 수 없다는 현실에 있다. 은행들은 『1금융권이 흑자도산 우려기업에 대출을 해줘도 2, 3금융권이 대출금 회수에 몰두한다면 결국 은행권의 집단부실만 부른다』며 『2, 3금융권이 여신회수를 자제토록 하는 방안이 함께 강구돼야 실효를 거둘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종금사 사장들이 이날 강부총리와의 오찬간담회에서 여신회수를 자제하겠다고 밝혔지만 「자기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종금사들이 약속을 액면대로 이행할 지는 미지수다. 은행과 2, 3금융권 사이의 골깊은 불신이 먼저 해소돼야 어떤 종류의 협약이든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게 금융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협조융자로 부실화된 은행에 한국은행 특별융자를 실시한다는 방침도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은 특융은 늘 특혜시비, 통화팽창과 그에 따른 물가불안, 엄청난 국민부담 등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다. 「은행의 부실은 은행책임」임을 강조하면서 돌아서선 한은특융을 거론하는 자체가 모순이란 지적이다.
또 협조융자협약으로 인해 자구노력을 서둘러야 할 기업들이 해이해질 가능성도 많다. 정부는 그동안 누차 구조조정이 절실하다고 외쳐 왔지만 『이제 망할 기업은 다 망했다』며 사실상 「구조조정」의 종결을 선언한 셈이다.
금융계는 자율의 형식을 빌린 정부개입이 결국 정부정책의 불투명성만 높이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위기상황을 막으려는 의지는 충분하지만 그 실현 가능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손동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