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투자·생산이 원인/정치도 혼란 ‘비관적’/과감한 개혁 안하면 위기해소 10년 걸려【뉴욕=김인영 특파원】 지난해 8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동아시아에서 멕시코 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아시아 호랑이들」의 경제가 수출 둔화, 경상수지 적자 누적으로 휘청거리고 있고 서울에서 자카르타에 걸친 정치불안이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상으로 지적된 국가는 한국을 비롯, 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 등 5개국이었다. 그때 한국은 물론 동남아 국가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이 기사에 대해 코웃음을 치며 멕시코 사태 재연 가능성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1년 후 태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의 태풍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을 거쳐 홍콩·대만·한국에 상륙했다. 급기야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 열도마저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갔고 세계 최대 금융시장인 뉴욕 월가도 아시아의 기류변화에 잔뜩 흐려있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지금 서구의 언론, 경제전문가들은 아시아 경제의 또다른 위기 발생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미 월스트리트 저널지지는 서울에서 방콕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전지역은 지난 1929년 대공황 이래 가장 심각한 디플레이션에 직면해 있다고 분석했다. 디플레이션은 수요를 초월한 생산 과잉으로 공산품 가격하락, 공장가동 중단이 속출하는 불황기의 현상이다.
미 경제학자들은 디플레이션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올해 평균 성장률이 지난해의 절반인 4%대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아시아 경제가 세계최대 공황이었던 30년대초 대공황에 버금가는 최악의 디플레이션에 진입했으며 장기화될 경우 성장이 정지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아시아의 충격이 세계 금융대란으로 확산되는 관건은 일본이 패닉에 빠질 것인가 여부다. 일본의 대동남아 투자 금액은 지난해말 총 1천1백80억달러로 동남아에 투자된 외국인 자본의 절반에 해당한다. 지난 여름 이후 동남아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지급불능 상태에 빠지자 이 지역에 투자한 일본은행들의 대출금이 상당수 회수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증권회사 ING 베어링에 따르면 일본의 악성 대출은 올들어 18%나 늘어났다.
후지·아사히 등 일본 주요은행들은 올들어 주가하락(15%)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일본은행들은 닛케이(일경)지수가 1만4천대로 떨어지면 손실이 1천억달러로 늘어나 대출을 중단해야 할 상황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본은 2천9백억달러의 미연방정부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뉴욕 월가는 일본은행들이 보유자금 확보를 위해 수십년간 사둔 미 재무부 채권을 대량 매각할 경우 미국 금융시장마저 큰 혼란에 빠질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미 경제분석가들이 아시아 위기를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로 이 지역의 정치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데다 정책 담당자와 기업인들이 위기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미국 투자가들은 금융 위기가 생산과잉에서 파생됐음에도 아시아 기업들이 여전히 과대한 투자를 하는 것을 아주 위험한 신호로 간주하고 있다. 미 언론들은 한국 철강·자동차업계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현대가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고 삼성이 자동차 사업을 확대하는 것을 같은 선상에서 보고 있다.
아시아 위기가 도미노처럼 확산되자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 펀드 등을 통해 자금 지원에 나섰다. IMF는 지난 8월 태국에 1백72억달러를 지원키로 한데 이어 10월말 인도네시아에 1백50억달러의 긴급 지원을 결정했다. 멕시코 위기때 지원한 1백20억달러보다 규모가 크다.
IMF는 긴급수혈을 통해 아시아 경제의 회생을 도와주고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장을 일단 차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동시에 지원을 받은 태국과 인도네시아가 IMF의 요구를 받아들여 재정긴축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들은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개혁은 피상적이고 근본적인 수술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 증권회사 골드먼 삭스사는 아시아의 리더들이 과감한 경제개혁을 기피할 경우 금융위기가 말끔히 해소되는데 1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리 경제가 동남아와 다르다고 주장해온 한국의 경제관료들과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해온 재벌들이 한번쯤 귀기울여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