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2월19일] 아시냐 권홍우 편집위원 프랑스 혁명이 곤경에 빠졌다. 돈 때문이다. 열정과 이상을 전파하는 데도, 외국 군대를 막는 데도 돈이 들어갔다. 반면 수입은 갈수록 줄었다. 혁명은 지긋지긋한 세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긴 사람이 많았던데다 징세 청부업자들이 도망간 탓이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혁명세력의 선택은 채권 발행. 압수한 교회 재산(약 30억리브르)을 담보로 금리 5%를 얹어 발행한 채권에는 ‘아시냐(Assignat)’라는 이름이 붙었다. 1789년 12월19일 처음 발매된 4억리브르 규모의 아시냐는 액면 1,000리브르라는 고액에도 금세 동이 났다. 국유재산을 헐값에 사들일 수 있는 딱지로 여겨진 덕이다.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공급물량 과다 속에 이자마저 없어지고 법정화폐로 성격도 바뀌었다. 액면도 점점 작아져 5리브르짜리를 거쳐 15수짜리 소액권까지 나왔다. 아시냐 지폐가 가장 많이 통용될 무렵 통화량은 약 350억리브르. 담보가치를 훨씬 초과하는 남발은 통화가치 하락과 물가 폭등을 낳았다. 최고가격제와 아시냐 수령 거부시 사형이라는 혁명당국의 극약 처방에도 아시냐 발행 4년 만에 물가는 130배나 뛰어올랐다. 결국 혁명정부는 손을 들고 1796년 2월 강제유통을 폐지시켰다. 지폐 제조기도 불태웠다. 아시냐가 없어진 후에도 프랑스는 망다(Mandat)라는 이름의 새로운 종이화폐로 혼란을 겪다 1803년 나폴레옹이 프랑화 체제를 도입하고서야 안정적인 통화를 갖게 됐다. 아시냐는 재정뿐 아니라 혁명에도 타격을 가했다. 통화 문란과 경제난이 개혁 피곤증을 확산시키고 종국에는 나폴레옹의 독재권력을 불렀다. 경제가 정치를 좌우한 셈이다. 한국에도 정치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묻고 싶다. ‘아시냐의 교훈을 아시냐’고. 입력시간 : 2006/12/18 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