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산권의 종주국이던 구소련을 처음 가 본 것은 제7회 모스크바 국제도서박람회에 참가할 때였다. 당시 정부는 88서울올림픽으로 한국의 위상이 한껏 고조되자 정부는 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강력한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소련과 첫 결실은 한렐?무역협정체결로 나타났고 두 번째 결실은 제7회 모스크바 국제도서박람회에 한국도서의 전시와 한국 출판인의 모스크바 방문으로 나타났다.
우리 일행은 출협 임원과 원로 출판인 20명, 취재기자 1명 등 모두 21명이었다. 나는 당시 출협 상무이사로서 참가했는데 우리는 미리 전시용 도서 751종, 1,802권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리고 89년 9월 7일,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동경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 낮 12시경 모스크바로 향했다. 비행시간은 9시간이 넘게 걸렸다.
공항에 도착하자 소련 국영여행사인 인토리스트(Intorist)의 가이드인 중년 여성 이레나가 마중했다. 모스크바 공항은 한적하고 어둠침침해서 밝고 붐비던 일본 나리따 공항과 큰 차이를 보였다. 이레나는 우리를 낡은 베오그라드 호텔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여기가 아니다. 우리가 예약한 곳은 1급인 코스모스호텔”이라고 항의했지만 이레나는 자기는 명령대로 할 뿐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이레나의 안내로 전시장으로 갔다. 우리가 예약한 한국관 부스는 칸막이만 돼 있을 뿐 전시대도 없고 안내용 책상과 의자도 없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일행 중 한 분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담배 한 갑씩 나누어 주자 그제서야 뭐가 필요한가를 물었다. 전시대와 책상, 의자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어디선가 금방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게 고마워서 담배와 일회용 라이터를 선물했더니 이번에는 빨간색 카페트까지 깔아 주었다.
책을 전시한 후 전시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64개국에서 2,000여 출판사가 참가했다는 전시관은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북한은 참가하지 않았다. 우리보다 3배나 큰 부스를 예약하고 전시용 도서까지 보냈다가 한국 참가에 항의해 불참한 것이라고 했다.
9월 12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도서 박람회는 첫날부터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한국 부스에도 하루 평균 1,000 명 가까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관심을 보였다. 타슈켄트, 알마아타 등 소련 연방공화국 내의 먼 곳에 사는 고려인들과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일부러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 반갑다”를 연발했다.
전시 기간 중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한국 부스의 안내를 맡았던 모스크바대학 정보통신학과 인무학 교수, 통역을 맡았던 모스크바 방송국 아나운서 노치근씨와 고려인 여성 나타샤, 한의사 김 니콜라이, 그 외에도 한국학을 전공하는 소련 학자들도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전시장이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붐비다 보니 전시 기간 동안 약 300부의 책을 잃어버렸다. 한국도서 중에서는 태권도와 한국요리에 관한 책이 가장 인기였고 다음으로는 자수와 매듭, 한국의 민속과 아동도서의 순이었다.
전시 기간 중 우리는 코스모스호텔에서 한ㆍ소간의 출판협력에 관한 세미나도 열었고 그날 저녁에는 권병일 출협회장 초청 리셉션도 열어 성황을 이뤘다. 9월18일, 제7회 모스크바 도서박람회가 막을 내렸다. 우리는 처음 예정했던 대로 전시했던 모든 책을 레닌도서관과 소련 아카데미 동방연구소, 모스크바대학, 아프리카 아세아대학 조선어학부, 외국문학도서관 등에 기증했다.
특히 타슈켄트에서 고려인 신문을 발행한다는 이국진씨는 전시 첫날부터 끝날 때까지 자기 일처럼 도와 주며 국어사전이 소원이라고 해서 전시가 끝난 뒤 국어사전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고려인협회 회장인 박미하일 교수는 고려인 도서관을 만들려고 한다며 전시된 책 모두를 기증해 달라고 했지만 사전에 각 대학 등에 기증하기로 약속된 일이어서 그 뜻을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 모두의 마음은 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웠음을 꼭 전하고 싶다.
<권구찬기자 chans@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