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위치한 영릉은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생전에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잠든 헌릉 서쪽에 묻히려 했으나 그곳은 물(水)이 나는 흉지라 해 승하 후 예종 1년(1469) 현 위치에 안치됐다. 풍수로 볼 때 영릉은 북성산의 기운을 받아 북현무ㆍ남주작ㆍ좌청룡ㆍ우백호ㆍ안산ㆍ조산이 모두 자리잡고 있어 인위적으로 배치하려고 해도 못 만들 천혜 명당이다. 게다가 정북 방향을 등지고 정남쪽을 바라보는 자좌오향(子坐午向)인데 이는 "3대를 적선해도 차지하기 힘든 대길터"라고 한다. 관련 역사가들은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 하여 세종대왕을 영릉에 모신 이후 조선왕조의 운세가 100여 년이나 연장됐다고 말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의 왕릉은 무덤의 기능을 넘어 왕의 일생을 말해주고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남한의 조선왕릉 40기와 주변 왕족 무덤 7기, 북한의 제릉과 후릉까지 총 49기의 조선왕릉을 다룬 책은 왕릉을 통해 조선 역사의 뒷얘기를 풀어내고 있다. 풍수 이야기로 읽을거리를 마련했고 왕릉과 그 주변을 아우르는 기행서 몫까지 톡톡히 해낸다.
한 사람이 묻힌 뒤 역사의 축을 돌려놓은 묘가 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남연군 이구의 묘다. 남연군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인 이병원의 아들로 옹통 승계와는 전혀 관련없는 촌수였다. 하지만 다른 일가가 계자(한 촌수 아래 사내를 아들로 삼아 대를 잇는 것)로 입적되면서 영조의 증손자 반열로 올라섰고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과 형제 항렬이 됐다. 그 남영군의 막내아들인 흥선대원군이 야인(野人)이던 시절, 명당을 찾아 충청도 일대를 뒤지던 중 홍성ㆍ청양ㆍ보령을 아우르는 오서산 자락에서 왕이 난다는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를 찾아냈다. 흥선대원군은 남연군 묘를 이장한 지 7년만에 훗날 고종황제가 되는 둘째 아들 명복을 얻었다. 땅의 기운이 센 만큼 이 묘의 운명은 기구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1866년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다 실패한 뒤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화했고 천주교인 1만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훗날 일제는 순종 이후 또다른 왕의 출현을 두려워해 이 묘의 맥을 절단했고 그 흔적은 지금도 목도할 수 있다.
조선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왕릉에 얽힌 이야기는 이 뿐만이 아니다. 연산군의 폭정 때문에 왕이 된 중종은 남의 덕으로 원치 않는 왕이 된 탓에 살아서는 척신들의 등살에 힘들었고 죽은 뒤에는 고약한 부인 문정왕후(명종의 생모) 때문에 억지 이장된 인물이다. 중종은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요절한 장경왕후의 옆 희릉에 묻혔으나 문정왕후가 이를 못마땅히 여겨 선릉 옆 정릉으로 옮겼는데 이 자리는 물이 차는 흉지라고 한다.
저자는 "당시 왕실에서는 역대 왕릉의 명당 운기가 현 임금의 수명과 발복에 직접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고 당파대결의 승패도 가늠할 수 있는 것이기에 왕릉 터의 풍수 정보는 국가기밀에 속할 정도였다"고 소개한다. 마침 설을 맞아 성묘길 가족들이 풍수이야기를 화제 삼기에 좋을 책이다. 2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