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日 바둑 영웅전] 한번 더 외면하기

제6보 (87∼100)



백이 88의 자리를 추궁하면 흑은 매우 거북하게 된다는 것을 구리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곳을 고지식하게 후수로 지킬 여유는 없다. 구리는 그곳을 방치하고 흑87로 시비를 걸고 나섰다. 여차직하면 상변의 왼쪽 흑 한 무더기를 포기하고 둘 생각이다. 흑87이 놓인 시점에서 이세돌은 8분의 시간을 썼다. 흑87에 대해 직접 응수할 것인지, 아니면 오래 전부터의 노림인 백88을 결행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숙고의 시간이었다. 이윽고 그는 결심했다. 지금 추궁하지 않으면 영영 때를 놓칠는지도 모른다. 백88이 반상에 놓였다. 이번에는 구리가 생각에 잠겼다. 상대가 칼을 뺐는데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할까. 숙고 10분. 그는 상변을 한 번 더 외면하기로 했다. 흑89로 누르고 흑91로 힘차게 차단. "쌍방이 제 갈 길로 가버리고 있어요. 기세와 자존심의 싸움입니다."(목진석) 백92에는 흑93이다. 상변의 왼쪽을 백이 잡아가면 흑은 하변을 큼지막하게 차지할 예정이다. "대단한 배짱이고 현명한 처사입니다. 지금은 그쪽을 돌볼 때가 아닙니다."(원성진) 만약 흑이 참고도1의 흑1 이하 5로 상변을 살리면 백6의 단수가 너무도 강력하다. 좌변이 모두 백의 확정지가 될 것이고 중원의 흑도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전보의 흑93은 현명했다. 흑97은 좌변의 백진을 유린하는 급소였다. 백98은 어쩔 수 없다. 참고도2의 백1로 차단하는 것은 무리. 흑2 이하 18로 백이 망하게 된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