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0년, 네덜란드 플랑드르의 화가 얀 브뢰헬 1세는 독특한 그림 한 편을 그렸다. 왼쪽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 그림은 원숭이 한마리가 만발한 튤립 앞에서 서류를 보고 있다. 가운데로 가면 튤립을 손에 쥔 채 만세를 부르는 원숭이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금화를 세고 있는 또 다른 원숭이가 눈에 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선 원숭이 몇마리가 주먹 다툼을 하고 있고 더 먼 곳에선 장례 행렬도 보인다.
얀 브뢰헬이 이야기 하려 했던 것은 이 시기 네덜란드에 불었던 튤립 광풍과 그 후유증이었다.
1630년 초, 네덜란드 귀족과 상인들은 그림 외에 고급스러운 정원 가꾸기로 부와 교양을 과시했다. 이때 오스만튀르크 제국에서 물 건너 온 튤립은 희소성 덕에 과시욕 넘치는 이들 사이에서 명품이 됐고, 튤립 가격은 비정상적으로 급등했다. 이른바 '튤립 버블' 속에 당시 최저 소득층인 굴뚝청소부까지 튤립 투기에 나섰다. 그러나 1937년 반전이 일어났다. 오를 대로 오른 가격 탓에 튤립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고, 수요가 뚝 끊기며 버블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얀 브뢰헬이 그림 속에 그려 넣은 우스꽝스러운 원숭이는 바로 튤립 투기자들이었다. 바보 원숭이들의 행진은 단지 역사 속 한줄일 뿐일까. 당장 한국 금융시장까지 뒤흔들었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시작은 미국의 부동산 버블이었다. 그보다 앞선 1990년대엔 일본이 부동산 버블 붕괴로 '잃어버린 10년'을 겪어야 했다.
이 책은 미술과 경제학,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분야를 맛깔나게 버무려 과거와 현재를 통찰한다. 언론사 문화부장으로 경제·미술 기사를 써 온 저자는 명화 속에 숨겨진 경제학의 코드를 찾아 예술, 경제,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의 해석을 담아냈다.
책은 미술 작품을 통해 경제 현상을 설명하거나 경제학 이론을 토대로 미술 작품을 해설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예컨대 지오토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를 통해 독점과 담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지구본을 들고 있는 유럽 절대군주들의 초상화를 보며 대항해 시대의 중상주의를 설명한다.
대중에게 친숙한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설도 눈길을 끈다. 중고등학교 미술시간 때 한번쯤 봤을 법한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기'는 당시 부르주아 평론가들로부터 불온한 그림이란 비난을 받았다. 농민 여성이 운명의 세 여신처럼 화면을 압도하며 등장한 데다 저 멀리 곡식을 나르는 일꾼과 그들을 지휘하는 말 탄 감독관의 모습을 보여 빈부격차를 고발하고 노동자를 선동하는 인상이 강하다는 이유였다. 책은 이 같은 일화와 함께 빈센트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들', 오노레 도미에의 '3등석 객차'를 보여주며 인류의 고질적인 문제인 빈부격차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미술과 경제학으로 서구의 과거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도 크다. 독과점, 빈부격차, 투기… 명화 속에서 발견되는 키워드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인류를 따라다닐 꼬리표들이다. 저자는 "모든 예술 작품에는 알게 모르게 그 시대의 상황이 녹아 있게 마련"이라며 "역사가 된 예술 작품을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명화를 감상하며 그 속에 담긴 해석과 경제학적 의미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1만6,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