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 샐러리맨의 사무공간 밀집지역으로 사람들의 숨 막히고 바쁜 일상 단면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곳에 고단한 현대인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잠시 일탈도 하게 하는 문화적 오아시스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지난 2000년 3월27일 개관한 LG아트센터다. 그로부터 딱 14년이 흐른 지난달 27일, 신임 사장으로 임명돼 공식 업무를 시작한 지 정확히 100일을 지낸 정창훈(사진) 대표를 LG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사람도 공간도 의외였다. 우선 개관기념일임에도 정 대표는 엄격한 정장 대신 청바지 차림이었다. 신선했다. 봄을 넘어 때 이른 초여름 더위가 닥친 날이었음에도 공연장 안은 난방을 가동한 듯 더운 기운이 돌았다. 이상했다.
"지금 진행 중인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공연 '풀문'에서 공연시간의 3분의2 가까이 계속해서 물이 쏟아져 내립니다. 출연하는 독일 무용수들이 추위를 호소하며 내부온도를 조금 높여달라 하더라고요. 물이 얼마나 쓰이는지 아십니까. 자그마치 8톤입니다. 저희 공연장은 물불 가리지 않고 관람객의 즐거움과 색다른 기쁨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첫인상에서부터 공연장을 이끄는 대표이사다운 면모, 즉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수준 높은 공연을 위해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 정 대표는 김의준·윤여순 전 대표에 이어 LG아트센터의 세번째 수장이 됐다. 지난해 12월16일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정 대표는 1990년도에 LG전자에 입사했고 마케팅과 재무관리 등의 업무를 주로 맡았다. 2000년 이후로는 LG그룹 본부에서 종전 회장실 격인 구조조정본부에 근무하며 관계사 지분정리 및 핵심 사업 강화를 진두 지휘했다. 비핵심 사업은 매각하거나 조인트벤처 설립으로 돌파구를 찾는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즉 공연장 사업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주로 해왔다. 그래서 그를 '예술 문외한'으로 봤다가는 큰코 다친다. 임원으로 진급한 뒤 정 대표가 맡은 일은 브랜드 관리였다. 프랑스 화가 폴 세잔의 대표작 '피리 부는 소년'이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며 빈센트 반고흐나 에두아르 마네 등 유명 화가의 작품 속 인물들과 어우러지는 이른바 'LG 명화 캠페인'이 바로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LG의 제품들이 마치 예술작품처럼 '명작'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며 기업 이미지의 품격까지 높여 성공적인 캠페인으로 평가받았다.
"한눈에 알아보는 명화 이미지를 차용해 우리 제품과 연결하는 픽처인픽처 기법으로 광고를 만들었죠. 그렇다고 제가 예술 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경영의 핵심 포인트가 '소통'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당시에는 명화를 이용한 광고를 제작해 고객들과 공유하는 방식으로 소통했고요. 지금은 LG아트센터가 선보이는 수준 높은 공연들로 우리나라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실하니까요."
LG그룹의 기업 메세나 활동으로 공익법인 LG연암문화재단이 설립한 LG아트센터는 모기업의 경영실적에 따라 프로그램 기획과 공연장 운영이 들쑥날쑥하던 타 공연장과 달리 예술경영 전문가에 의한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운영을 실천해오고 있다. 개관 이래 매년 평균 20~30여편의 엄선한 기획공연을 꾸준히 선보였다. 연극·무용·클래식·재즈와 월드뮤직 등 전 장르를 아우르며 그동안 해외 유명 공연장이나 페스티벌에 직접 가야만 볼 수 있었던 독특한 작품들, 혹은 동시대를 살면서 우리 관객들이 꼭 봐야 할 작품들, 그리고 문화적 세계관을 넓히는 의미 있는 공연들이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에 LG아트센터는 이후 건립된 공연장들과 지방자치단체 공연장들의 모범사례로 자리 잡았다. 그런 LG아트센터를 지난 석달여 동안 꼼꼼하게 들여다본 정 대표의 결론은 "문제점이 없는 게 문제일 정도"였다.
"자만한다고 꾸짖으실지 모르지만 2000년 개관 이후 저희는 선도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지금 시점의 고민이라면 우리 스스로를 '리인벤트(재발명·re-invent)'하는 작업이 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우리와 비슷한 기획력을 가진 경쟁 공연장들이 많아졌고 그 과정에서 관객의 수준과 안목도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1등이 좋은 이유는 '무한한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죠. 공연을 자주 보지 않는 분일지라도 최우선으로 찾는 공연장이 LG아트센터라면 더없이 좋습니다. 스틸리더십(still leadership)이라는 포지션에는 변함이 없지만 바뀐 환경을 감안하고 관객 수준을 고려해 더욱 수준 높은 공연을 선도적으로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 대표가 부임하기 전 이미 올해의 공연은 모두 확정된 상태였다. 따라서 무리한 시도는 할 수도 없으며 올해의 공연 19개 작품 모두 수작이라 억지로 모험을 할 생각도 없다. 다만 몇몇 뜻있는 예술가들이 장르를 초월한 '융복합 공연'을 시도해 새로운 경험과 색다른 감동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라면 "예술에서의 융복합성은 현대 컨템포러리 아트가 갖는 특징인 만큼 경계를 넘는 퓨전 성격의 작품이 나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이라 응원과 지원을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굳이 욕심을 내자면 클래식 음악 장르 중 실내악(체임버)을 조금 더 강화할 계획이다. 국내에서 실내악은 오케스트라나 독주회에 비해 인기가 덜하다. 비인기 종목인 만큼 지원하고 싶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6년 전 시작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LG와 함께하는 사랑의 음악학교'가 계기가 됐다. 이는 음악가가 되고자 하는 중고등학생들을 전문가 심사위원의 오디션을 거쳐 선발해 실내악 수업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한국은 경쟁적 입시환경 탓에 독주 위주로 음악수업이 이뤄지는데 외국 음악인들은 호흡을 맞춰가며 다른 연주자의 소리를 가까이서 듣는 실내악이 몸에 익어 있기 때문에 결국 국내파가 해외로 나갔을 때는 '실내악도 못하는 절름발이'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독주가로 키워진 뒤 나중에서야 앙상블을 배우려 하니 자연스럽게 익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오랜 시간 체화돼야 남의 소리를 듣는 이해심과 배려심이 키워지니까요. 그렇게 시작된 프로그램의 성과로 뉴욕 링컨센터 체임버뮤직쇼사이어티까지 진출하고 가장 권위 있는 실내악 교수들이 커리큘럼을 짜주는 수준 높은 교육과정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마 앞으로 한국에서 실내악 하는 학생들은 'LG 사랑의 음악학교' 출신일 겁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이 학생들에게 보여줄 만한 세계적인 실내악 공연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저희부터 실내악의 저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 좋겠고요."
세계적 수준의 공연을 선보이는 LG아트센터의 수장인 정 대표는 사실 밴드의 기타리스트 겸 리드보컬이다. 4년 전 LG에 근무하는 임원들과 의기투합해 '노컴플레인'이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했다. 영문법을 파기한 밴드 이름부터 멤버들의 기발함이 엿보인다. 신입사원 때부터 함께 근무해온 동료들이라 연습을 자주 못해도 호흡은 잘 맞는다. 홍대 앞과 이태원 등지에서 수차례 공연도 한 실력파다.
"중학교 때부터 용돈이 모이면 낙원상가로 가 통기타를 사곤 했죠. 이태원 '우드스탁'에서의 공연이 가장 최근이었네요. 밴드 출연료로 5만원과 무료 맥주 3병을 받았지만 팬들의 호응이 있었으니 불만은 없습니다. 음악과 관련한 공연은 즐겨 찾는 편입니다. 1990년대 초 미국에서 근무할 때 빌리 조얼과 엘턴 존의 듀엣 공연을 봤었어요. 나란히 마주 보고 있던 그랜드피아노 두 대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서로 만나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열 번 이상 봤고요. '사운드 오브 뮤직'은 노래가 좋아 아이들과 함께 따라부르기도 했고, 지금도 한번씩 꺼내 봅니다."
열린 소통 의지와 일등 공연장에 대한 자부심, 그 신뢰를 지키려는 노력, 그리고 예술에 대한 관심과 열정. 정 대표는 LG아트센터와 잘 맞아떨어졌다.
"우리 공연장의 또 하나 자랑거리라면 기획·무대기술·운영팀이 엄청난 전문가들이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사명감도 큽니다. 그러니 저는 그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임무겠지요. 올해 남은 공연들, 무엇을 보시든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사진=이호재기자
● 정창훈 대표는 △1965년 경남 진주 △1984년 서울 오산고 △1988년 연세대 경영학과 △1990년 미국 리하이대 MBA 석사 △1990년 LG전자 △1995년 LG전자 해외홍보팀장 △1998년 LG전자 싱가포르 아주지역본부 △1999년 LG전자 금융기획그룹장 △2002년 LG구조조정본부 사업조정팀 부장 △2005년 ㈜LG 브랜드 관리팀 부장 △2008년 ㈜LG 브랜드 담당 상무 △2013년12월~ LG연암문화재단 LG아트센터 대표 △저서 '기업 브랜드의 전략적 경영' |
초대권 없애고 시즌 패키지 도입… 선진 공연문화 정착 앞장 ■ 정 대표의 경영철학
LG아트센터는 개관과 동시에 '초대권 없는 공연장'을 선언했다. 당시로서는 도발적인 선언이었다. 한국의 공연 실정을 무시하는 행태라고 질타도 받았다. 사실 초대권 문화는 우리나라 공연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병폐로 지적돼왔다. 상당수 의식 있는 문화인들이 정화 노력을 폈음에도 한국 특유의 접대문화와 절대적인 관객 수 부족으로 초대권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필요악인 초대권의 폐단으로 공연계의 자생력마저 저하되는 상황에서 LG아트센터의 시도는 여러모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초대권 없는 공연장'의 원칙은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지켜지고 있다. 관행에 따라 초대권을 요구하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LG아트센터 공연은 사서 봐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내렸다. 초대권이 없어지면서 객석 풍경도 변했다. 기존에는 객석의 대부분이 예술계 관계자들 혹은 각 장르별 고정 마니아 관객들로 채워지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어느새 입장권을 구입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바뀌었다. 또한 LG아트센터는 국내 공연장으로는 최초로 '시즌 패키지' 제도를 도입했다. 시즌 패키지 제도란 매년 연초에 1년치 기획공연을 한 번에 모두 오픈한 다음 관객이 보고 싶은 공연을 묶어서 일괄 구매하는 방식이다. 장르별로 패키지를 묶어 구매하거나 5개 혹은 10개씩 패키지로 구매할 경우 할인혜택도 받을 수 있다. 매년 기획공연 전체 판매량의 약 15~20% 정도가 패키지 티켓으로 미리 판매될 정도로 관객들의 관심도가 높은 편이다. 이를 통해 공연문화의 저변확대가 가능할 뿐 아니라 공연장이나 공연주체들도 안정적으로 작품을 공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난 14년간 LG아트센터를 거쳐간 작품들만 봐도 입이 쩍 벌어진다. 국내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세계 예술 거장들의 작품이 내한해 한국 관객들의 목마름을 달래줬다. 연극은 피터 브룩, 레프 도진, 로베르 르파주,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 리 브루어의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무용은 피나 바우슈를 비롯해 매튜 본, 사샤 발츠, 오하드 나하린, 마기 마랭의 작품을 선보였으며 클래식 음악으로는 필립 헤레베헤, 트레버 피노크, 조르디 사발, 스티브 라이히 등의 작품이 다녀갔다. 재즈와 월드뮤직의 지평도 넓혀팻 메시니, 소니 롤린스, 웨인 쇼터, 질베르토 질 등의 음악을 들려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