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덤핑협상에 거는 기대

현재 제네바 소재 세계무역기구(WTO)에서는 21세기 세계무역질서를 새롭게 규율할 규범을 만들기 위한 협상인 이른바 '도하개발어젠다(Doha Development Agenda)'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협상에서 우리 무역업계가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공산품 관세인하와 WTO반덤핑규범 개편 등 두 가지다. 아직도 관세가 무역의 원활한 흐름에 장애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역업계가 도하라운드 관세인하 협상에 큰 기대를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덤핑 부문에 대한 관심이 큰 것도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해외시장에서 우리 수출상품은 지난 6월 말 현재 100여건의 반덤핑규제를 당하고 있고, 매년 새로이 조사개시를 당하는 건수가 20여건에 달한다. 95년부터 2001년까지 새로 조사개시를 당한 건수 기준으로 중국(255건)에 이어 세계 2위(138건)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지난해 무역협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기업들이 반덤핑으로 피소되어 조사를 당하는 과정에서 변호사 등의 고용을 위해 건당 평균 1억1,000만원을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내 변호사(in-house lawyer)를 통해 간단히 제소장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제소자와 비교때 대단히 불공평한 비용부담이다. 비용뿐만 아니라 반덤핑조치는 조사개시 자체만으로도 모든 잠재적 수입자로 하여금 해당품목의 수입을 기피하게 만들어 수출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번 반덤핑부문 협상에 적지 않은 기대를 갖고 협상추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는데 협상초반이긴 하지만 제네바 현지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그렇게 희망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큰 협상의 걸림돌은 미국의 소극적인 자세다. 지난해 도하 각료선언을 채택할 직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자국 반덤핑법의 약화를 우려해 현행 규범의 개정을 터부시해오다 시애틀에서의 실패를 반복할 경우 자국을 향한 비난을 우려하여 마지못해 반덤핑제도의 근본취지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하여 우여곡절 끝에 반덤핑협정 개정문제가 협상의제로 채택되었다. 규범개정에 미국이 반대하는 논리는 많은 개도국의 반덤핑 조사절차 가 투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 보다 진전이 있기 전까지는 제소남용 억제 등을 가져올 추가적인 협상은 곤란하다는것으로서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좀 더 숙고하여 생각해보면 미국의 논리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개도국이 투명한 절차가 부족한 것이 반덤핑분야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부문에도 비슷한 수준인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제네바까지 갈 항공운임도 부족해 자국의 이해관계가 다른 나라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보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나라들에게 반덤핑절차를 100여년간 운용해온 나라처럼 투명하게 운영하도록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닌가 싶다. 개도국에 대한 기술지원 및 능력배양 문제가 WTO에서 논의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설령 개도국의 투명하지 못한 제도운영으로 미국이 피해를 본다면 현재에도 얼마든지 분쟁해결절차에 따라 WTO에 제소하여 패널판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개도국의 제도를 보다 투명하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 반덤핑법의 효시를 캐나다의 1904년 관세법으로 볼 때 국제무역에서 덤핑문제를 규제하기 시작한 이후 한 세기가 흘렀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반덤핑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경쟁법의 일부로 흡수되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곤 한다. 한 세기 이상의 역사를 지닌 반덤핑법(antidumping law)을 내다버리고(dump) 이제는 경쟁법의 범주로 다루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는 물론 반덤핑제도로 오랜 괴롭힘을 당한 우리 무역업계의 희망이다. 이번 협상을 통하여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현재 만연되고 있는 제소남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도록 규범 개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우리 협상팀의 활약을 기대한다. 또한 미국으로서도 WTO반덤핑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할 것이다. 도하라운드의 성공을 위해서, 아니 적어도 '미국 때문에 도하라운드가 깨졌다'라는 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말이다. /韓永壽<한국무역협회 전무이사ㆍ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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