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말 춘란배세계대회 결승전 이전까지 이창호의 성적은 26승4패. 그러나 그뒤 한달간 그는 1승5패의 형편없는 전적을 기록했다. 「세계 랭킹 1위」 라는 위상과는 걸맞지 않게 너무나 초라한 기록이다. 시작은 중국이 주최하는 춘란배에서 종합전적 1승2패로 조훈현9단에게 우승컵을 넘겨주면서부터. 이대회 이후 이창호는 중요한 국내 대국에서도 3연패를 기록중이다.이창호는 지난달 21일 제7기 배달왕전 16강전에서 최명훈7단에게 지는 바람에 8강에 오르지 못하는 이변(?)을 보였다. 26일에는 국내기전 중 총상금이 가장 많은 테크론배 준결승전에서 유창혁9단에게 불계패함으로써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또 지난2일 시작된 왕위전 결승5번기 1국에서도 도전자 유창혁에게 반집 차로 패했다.
「이창호시대」가 열린지 10여년만에 전례에 없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창호가 이렇듯 참담한 수렁에 빠진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일부 바둑 평론가들은 『한마디로 10여년간 피말리는 도전기를 치러 지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즘들어 이창호의 기보에서는 정상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승리의 쾌감이나 균형감각이 사라졌다고 평가한다. 테크론배 준결승에서 유창혁과 대국이 결정적인 사례라는 것.
이날 대국에서 이창호는 초반의 패착을 딛고 종반 무렵엔 우세를 확립했는데 형세를 비관한 나머지 강수를 연발하다 패했다. 반집까지 계산한다는 「신산(神算)」 이창호가 실수를 한 것이다. 왕위전에서도 이창호는 유창혁에게 전매특허같은 「반집 차」로 지고 말았다.
그러나 대다수 바둑 관계자들은 이창호의 패배를 내적인 이유보다는 상대 기사들의 선전에서 찾는다. 조훈현·유창혁·최명훈은 국내 랭킹 2~4위를 차지하는 강자들이다. 이들에게 연달아 패했다고 해서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월간 「바둑」지 편집장 정용진씨는 『이창호는 발가벗겨진 정상이다. 아킬레스건이 완전히 드러났다』고 말한다. 즉 정상급 기사들의 바둑연구는 그동안 이창호에 집중돼 있었고, 기술적인 측면에서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끊임없이 새로운 수를 제시해야 하는 이창호보다 뒤따르는 기사들의 기술 발전이 더 빠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조훈현과 대국을 제외하곤 모두 백을 쥐었다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의 덤 규정에선 흑번이 유리하다는 게 상식. 더구나 정상급 강호끼리의 대국에선 승패를 가를만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든다. 또 한가지는 이창호의 나이. 올해로 만 24세인데 아무래도 잡념이 많을 때가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그러나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이창호의 슬럼프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나무는 매듭이 없으면 비바람에 견디지 못한다』라는 정용진씨의 표현처럼 비약을 위한 하나의 준비단계라는 얘기다. 또 한국 바둑계를 위해서도 유창혁이 상승세를 타고, 조훈현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게 1인 독주시대보다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형욱기자CHOIHUK@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