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린 「숙명의 적수」 조훈현9단과 서봉수9단이 다시한번 만날까. 무대는 제30기 SK 엔크린배 명인전 8강전.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된 본선 1회전에서 서봉수9단은 윤성현6단을 꺾고 8강에 올라 5월7일 열릴 조훈현9단-백대현4단 대국의 승자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래도 조9단이 백4단에 한수위. 「어제의 라이벌」이 또한번 피튀기는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지난 27일 제33기 왕위전 본선리그 13국에서였다. 무려 345번째로 만난 두 기사. 두사람의 승부로는 바둑 외의 분야를 통틀어도 세계 최다 기록일 것이다. 역대전적은 238승 107패로 조9단의 압도적인 우세. 게다가 조9단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국수전과 패왕전 타이틀을 보유하면서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는데 비해 무관인 서9단은 「어제의 용사」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조9단을 만나자 서9단의 녹슨 칼날이 다시 시퍼렇게 날이 서기 시작했다. 왕년에 「된장바둑」 「잡초 바둑」 「야생마」 「승부사」로 불렸던 그의 바둑이 살아났다. 오랫만에 얼굴을 맞댄 두사람은 초반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폈다. 백을 쥔 서9단은 첫수부터 걸치기를 시도한 뒤 손을 빼고 양외목을 펼치는 특이한 전략을 펼쳤다. 적어도 조9단에게는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바둑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뇌리에 「꺼진 불도 다시보자」는 표어가 떠올랐으나 결과는 141수만에 조9단의 불계승. 그러나 두 기사가 사용한 시간은 조9단이 3시간 15분, 서9단이 2시간 59분이었다. 단명국임을 감안하면 두 라이벌이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때문에 관전자로선 타이틀이 걸려있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대국을 보는 일이 즐겁다. 서9단을 보면서 말년에 단역으로 출연한 한물간 스타를 연상한다면 오산. 지난해 10월 기성전에서 조9단을 꺾은 바 있고, 가끔 괴물같은 힘과 끈기로 이변을 일으키고 있다. 70~80년대 한국 바둑계를 양분하면서 「조-서 시대」를 연출하고 한국 바둑의 수준을 적어도 한점치수 정도는 올린 두 기사의 공방이 기대된다. /최형욱 기자 CHOIHUK@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