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계 일각에서 「디지털경영」의 미풍이 불고 있다.삼성전자와 LG전자 CU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자기업 답게 거의 동시에 디지털경영을 들고 나왔다. 두 회사는 최고경영자(CEO)가 앞장서서 이끌고 있다는 점도 같다. 종합상사에서 인터넷기업으로 극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삼성물산 역시 디지털경영을 선언했다.
과거 70, 80년대 일본 기업들은 「카이젠」, 「QC」(품질관리)를 전세계에 유행시켰다. 카이젠과 QC는 관리 로스를 줄이고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대안으로 떠올라 일세를 풍미했다. 세계 경영학계가 앞다퉈 이론화·이념화에 나섰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새 경영패러다임을 제시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다.
LG·삼성이 주창하는 「디지털경영」에서도 언뜻 그같은 대안의 경영모델을 떠올리게 만든다. LG전자 CU는 디지털경영에 「새천년의 경영사상」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였다. 구자홍(具滋洪)부회장은 『시대가 디지털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가야 할 유일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의 디지털경영은 기업의 구조부터 제도·관행·문화를 깡그리 디지털화 하겠다는 것. 윤종용 사장은 『모든 결재는 전자결재로 대체한다. 모든 보고는 구두, 전화 또는 1매 이내의 E-메일로 받겠다. 회의는 종이없이 PC로 하겠다』며 디지털경영을 솔선수범 하겠다는 결의까지 보였다.
삼성물산은 문서 위주의 업무방식과 조직 문화를 컴퓨터 모니터가 중심이 된 디지털체제로 바꿔 나가기로 했다. 삼성물산 직원들은 집이나 출장지 등 회사 밖에서도 노트북 컴퓨터나 데스크톱 PC로 본사 서버에 접속, 일정이나 출장결과 보고·자료 검색·업무협조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디지털경영은 결국 기업경영에서 생산·물류 배송 등을 제외한 나머지 업무는 모두 서버와 네트워크및 모니터 즉, 사이버공간에서 처리하는 것을 추구하는게 공통점이다. 거기서 「부가 가치」와 「+α」가 나온다는 것이다.
디지털경영은 덩치 큰 재벌그룹들이 뭔가 애타게 「변화」를 갈구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다. 「디지털」이라는 심벌을 앞세워 새 밀레니엄, 21세기 초(超)정보사회에 작심하고 대비하겠다는 비장함도 서려 있다.
그러나 「디지털경영」은 사실, 「디지털」과 「경영」을 짝지은 조어술의 기지는 보일지언정, 내용의 새로움은 별로 없어 보인다. 따지고 보면 디지털경영은 오래전부터 외국 선진기업들이 앞다퉈 도입한 새 기업문화다. 실리콘밸리 물을 먹은 웬만한 국내 벤처기업들도 이미 실천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실리콘밸리형 기업에서 권위주의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보스와 사원간에 E-메일은 완전 개방돼 있다. 디지털경영이 추구하는 투명성은 선진국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로 이미 확립돼 있다.
과거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보자」고 변화와 혁신을 외치던 어느 그룹에서 시험실 온도조절용 에어컨을 설치하는데 회사의 복잡한 업무절차 때문에 한달이 지나도 결국 설치하지 못한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한국 기업의 경험칙에서는 혁신과 변화의 구호와 선언이 「메이크업」으로 그친 예가 많다. 「구조의 한계」를 지적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디지털경영도 그러려니 하고 지레 무시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얼마나 힘있게 끌고 갈지는 지켜볼 일이다.
공교롭게도 재계 일각에서는 이처럼 디지털경영 바람이 부는데, 한편에선 대우그룹의 옥쇄(玉碎)를 동반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디지털경영과 정부의 요즘 재벌정책은 「메이크업」과 「구조변화」간의 상관성은 없는지 자문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