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과 실리사이에서… 盧의 줄타기

노무현 대통령은 5월 17일 6박7일간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첫 미국방문과 정상회담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그간의 관심과 성원에 감사 드린다”고 국민에게 인사했다. 그는 “한반도 안정과 경제발전의 토대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자평한 뒤 “부시 대통령과 한미 관계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정책적 전략에 합의했고,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공동목표를 두고 전략적으로 긴밀히 공조키로 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공항의 귀국 보고회장에서 이례적으로 육ㆍ해ㆍ공군 의장대와 국악대, 양악대, 전통의장대 등 231명으로 구성된 의장대를 사열했다. 이에 대해 정부의 한 관계자는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와 회담 성과를 자축하는 의미에서 의장대를 사열한 바 있어 이번에도 원래 예정엔 없었으나 청와대 참모진이 방미 성공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만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방미 결과를 놓고 극과 극의 평가가 쏟아지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노 대통령의 친미 일변도 발언 및 행태에 대해 초강대국인 미국을 의식한 실리주의 외교라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가 하면 과거의 사대외교보다 더 심한 굴욕적 외교라는 평가로 극명하게 엇갈려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비 노무현 지지층과 보수층이 이번 방미 성과를 칭찬하고 환영하는 반면 전통적인 친노파와 진보진영이 우려와 비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야의 반응에서도 한나라당이 민주당보다 칭찬의 강도가 높다. 냉정하게 말하면 적어도 공항에서 `팡파레`를 울릴 만큼 이번 방미의 성적표가 100점 짜리라고 하기에는 좀 이른 것 같다. 북핵 문제를 포함한 진짜 대미 관계는 이제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일고 있는 반미 기류에 은근히 동조하는 것으로 비쳐져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노 정권에 대한 경계심을 잔뜩 갖고 있었다. 이런 시선은 북핵 위기와 맞물린 채 경제계로 파급, 외국 투자가들의 투자 자제 및 국가신용평가등급 하향조정 가능성으로 까지 번지게 됐다. 노 대통령은 이번 방미에서 이런 우려를 상당부분 불식시킨 긍정적인 성과를 거뒀다. 다만 북한에 대해 “믿기 힘든 상대”운운하며 긴장 관계를 조성한 부분이 향후 어떤 현안으로 다가올 지가 걱정되는 대목이다. 여기에다 미국과의 공동성명에 `상황에 따른 추가적 조치허용`이 포함된 것도 북측을 자극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걱정스런 면은 노 대통령의 평소 스타일이 다변(多辯)인 점을 감안할 때 지지층의 비난에 대한 국내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국에서 보여준 행태와 또다른 행보를 보일까 하는 부분이다. 변절인가 실리 추구인가 노 대통령의 대미관(對美觀) 변화는 미국으로 떠나는 특별기 기내에서부터 귀국시까지 일관되게 진행됐다. “미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는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 것” “미국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호감을 갖게 됐다” 는 등의 `미비어천가(美飛御天歌)`를 마구 쏟아냈다. 불과 수개월 전 “미국 추종외교 반대” “수평적 대등한 관계정립” 등을 강조했던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시각이다. 당연히 국내의 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다. 이에 대해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은 “국익을 고려한 노무현식 실리주의 외교”라고 규정했다. 북핵 해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란 설명이다. 민주당 신 주류의 신기남 의원도 “국제사회의 신뢰를 가져온 큰 성과이며 감정적인 비난은 온당치 않다”고 평가했다. 보수적 인사인 소설가 복거일씨와 이철승 전 의원 등도 “불안했던 노 대통령이 미국에 대단한 신뢰를 심어줬다는 점은 높게 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후한 점수를 줬다. 국정원 인사와 잡초제거론 등으로 비롯된 정국 급랭의 와중에서도 한나라당은 이례적으로 노 대통령을 두둔하는 발언을 내놓았다. 박종희 대변인은 논평에서 “37분짜리 미니 단독회담이라는 일각의 비판도 있지만 전문과 4개항으로 구성된 공동성명은 의미가 있어 크게 환영한다”며 “무엇보다 대통령에 대한 미국 조야는 물론 국제사회의 적지 않은 우려가 어느 정도 불식된 듯 싶어 다행”이라고 긍정 평가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변신은 이런 고점(高點) 평가와 함께 저자세로 일관한 굴욕외교라는 비난에도 직면해 있다. 노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지는 송기인 신부는 “원칙을 그대로 밀고 나가지 못해 결국 (미국에) 끌려가는 외교가 된다”고 질책했고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는 “대북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심각한 문제를 노출했다”고 저 평가했다. 노 대통령과 코드가 가장 잘 맞는 시민단체로 여겨지던 참여연대도 성명을 내고 “한반도 평화 및 남북관계에 대한 철학의 부재가 드러났다”며 “미국 요구사항은 다 수용하고 우리 주장은 관철시킨 게 없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저자세 외교”라고 혹평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비난이 들끓었다. 김영환 의원은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대북포용정책에 상당한 후퇴를 가져온 일이며 남북관계의 경색을 가져올 수 있다”며 “추가 조치를 언급한 것도 자주적 외교노선을 통해 어떤 경우라도 북핵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지 않겠다고 한 입장에서 후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성호 의원도 “자주성과 주체성을 상실하고 북핵 문제의 대안도 모색하지 못한 굴욕외교이고 실패한 외교”라며 “민족내부 거래에 미국 개입을 인정한 반민족 행위”라고 날을 세웠다. 이밖에 청와대와 민주당, 노사모 홈페이지 등에도 방미 외교를 둘러싼 찬반논쟁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예고된 비판, 개의치 않겠다” 노 대통령은 기내에서 가진 방미 결산 기자 간담회에서 변신 여부를 묻는 질문에 “미국에게 듣기 싫은 이야기를 했으면 국내에서 또 다른 비판도 있었을 것이며 이에 개의치 않겠다”고 답했다. 사전에 준비된 행동이었고 예고된 비판이란 견해를 내비친 것. 노 대통령의 판단대로 만약 이전의 반미주의 같은 행태를 보였다면 양국의 파열음은 더욱 커졌을 것이고 미국내 반한 감정과 한국내 반미감정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한미동맹이란 기본적인 틀마저 위협 받는 위험한 상황으로 흘러 결국 경제적인 압박 및 대북 공격 가능성 고조 등으로 귀결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위기적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예고된 비판여론을 감수하면서도 철저히 몸을 낮추는 저자세식 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했다는 호 평가를 받을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어차피 초강대국인 미국에 대해 실리를 취하기 위한 정해진 수순이었다면 그 동안 왜 조금씩 하지 못했느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노 대통령은 방미 이전까지는 자주외교를 내세워 미국과 불편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무조건적인 저자세 식 사대주의 외교로는 더 이상 양국과 한반도 전체에 도움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이번 방미에서는 180도 딴 사람이 됐다. 수 개월만에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정세가 바뀌었는가. 아니면 노 대통령이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을 방미를 통해 알게 됐다는 것인가. 그간 노 대통령의 행보는 미국의 대 한국 푸대접으로 이어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전의 행보가 외교적 손실로 이어진 것. 국빈방문이 아닌 최하단계인 실무방문으로 조정됐고 통상 1시간 이상 진행되던 양국 정상회담은 15분으로 제한됐다. (실제 회담은 예정시간을 넘겨 37분간 실시됐다) 아무리 국빈에 걸맞은 예우를 받았다 해도 외교적으로는 사실상 홀대를 받은 것에 다름없다. 이 같은 미국측 대응은 그간의 노 대통령의 행동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많다. 불필요한 언행으로 외교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미국을 대해야 하는 불리한 협상분위기를 스스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예고된 `뺄셈 외교`는 양국의 공동성명 등에서도 나타난다. 대북 문제와 국론통합 등 과제 남겨 양국은 공동성명에서 대부분 북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 했지만 상황변화에 따른 추가적 조치 부분을 삽입해 북측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로의 전환을 시사했다. 그간 `북한에 대한 이해`와 `한ㆍ미 관계와 남북관계 병행` 쪽에 무게가 실려 있었으나 이번 방미를 통해 `북한 불신`과 `한ㆍ미관계 우선` 쪽으로 물꼬가 틀어졌다. 한발 더 나아가 노 대통령은 “북한을 그렇게 많이 신뢰하지 않는다” “북한의 궁극적 목적은 이해하기 어렵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ㆍ방법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도 했다. “북한은 이미 변하고 있다” “더 이상 (북한에) 퍼주더라도 투자를 해야 한다”는 등의 이전 대북관에다 “한ㆍ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병행해야 우리의 자주적 입장이 강화될 것”이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적에 “지당하다. 반드시 그렇게 풀어가겠다”고 천명했던 것과는 판이한 양상이다. 더욱이 공동성명의 추가조치 대목은 미국의 대북 제재 카드 사용 가능성의 길을 열었고, 사실상 미국측의 강경 매파 주장을 수용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평가다. 민족이냐 동맹이냐의 기로에서 핵 위협을 하는 민족보다 핵 제거를 목표로 하는 동맹의 편으로 등을 돌린 듯한 모습이다. 북한측은 아직 노 대통령의 방미 발언과 행동에 대해 뚜렷한 입장 발표는 자제하고 있으나 달라진 태도에 거부감을 가질 게 분명하다. 향후 남북 장관급 회담 등에서 북측이 어떤 스탠스를 보일 지도 주목된다. 이밖에 주한 미군 재배치 문제와 한국군의 현대화 문제도 결국은 미국 뜻이 상당부분 포함됐다는 평가다. 한국군의 현대화가 외견상은 맞는 말이지만 결국은 미국의 방산업체를 배불리기 위한 조항이 될 것이란 전망에서다. 실용주의 외교에 따른 성과에 못지 않게 국내에서는 노 대통령의 대미ㆍ대북관 변화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방미에 대한 복잡미묘한 반응들을 어떻게 설득, 조화시켜 북핵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성취하기 위해 국력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느냐도 큰 과제이다. 한ㆍ미 양국의 동맹체제는 실제로 어려운 과정을 거쳐 복원구도로 흐르고 있다. 노 대통령이 과거 모습에서 탈피해 `욕 먹으며 쌓아 놓은 공든 탑`인 셈이다. 이제부터라도 대외적인 문제에서 일관성 있는 정책기조가 유지됐으면 한다. <염영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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