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 사마르칸트에 있는 레기스탄 광장에 울르그벡 메드레세(왼쪽), 틸라카리 메드레세(가운데), 쉐르도르 메드레세(오른쪽)의 동상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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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에 번성기를 가져왔던 아미르 티무르 왕의 무덤이 놓여 있는 구르 에미르의 돔을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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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하라의 전통 시장인 굼바스에서 실크와 카페트 등 각종 기념품을 살고 있는 상인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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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의 숨결이 느껴지는 사막과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생겨난 도시들, 그리고 그 속에 자리 잡은 활기 넘치는 바자르(재래 시장). 13~14세기 중앙아시아를 호령했던 티무르 제국 시대에 메드레세(이슬람 신학교)에서 꽃을 피웠던 당대 최고 미술ㆍ건축ㆍ천문학과 건조한 대지 위에 우뚝 솟는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들.
‘중앙아시아의 진주’ 라 불리는 우즈베키스탄은 동쪽과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가, 서남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키르기즈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이 버티고 있다. 16세기 대항해 시대 이전만 하더라도 이 지역은 동과 서를 잇는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수많은 카라반(대상)들이 오고 갔으며 중국과 아랍, 그리고 몽고의 원정 군대가 바람처럼 달려 왔다가 사라져 간 땅이었다.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 우즈벡의 주요 도시는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답게 수많은 문화 유적지가 보존돼 있으며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9세기에 고구려의 유민 고선지 장군이 눈 덮인 파미르 고원을 넘어 오늘날 우즈벡 수도인 타슈켄트까지 쳐들어 갔던 것으로 기록됐으며 13세기초 칭기스 칸의 기마 부대가 당시 호레즘 제국을 공포로 몰아 넣기도 했다.
15세기 티무르 제국의 영화가 끝나면서 이 지역은 서서히 세계사에서 잊혀져 갔다. 대항해 시대의 개막으로 해상 실크로드가 육상 실크로드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공산 정권 수립을 계기로 이 지역으로 연해주의 우리 동포들이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면서 우리 민족은 또 하나의 아픈 역사를 가슴 속에 품게 됐다.
■실크로드의 중심지, 사마르칸트
수도 타슈켄트에서 남서쪽으로 350㎞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도(古都) 사마르칸트(Samarkand)는 13~14세기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아미르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사마르칸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아미르 티무르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이곳은 티무르와 깊은 인연이 있는 도시다.
물론 티무르 제국 이전에도 사마르칸트는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13세기까지 이 지역의 주요 도시로 중국에서는 ‘강국(康國)’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13세기초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전의 도시와 유물은 파괴되고 지금 남아 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14세기 이후 건립된 티무르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티무르의 무덤, 구르 에미르
‘구르’는 무덤, ‘에미르’는 왕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구르 에미르는 ‘왕의 무덤’이라는 의미로 아미르 티무르가 오트라르 원정에서 죽은 자신의 손자 무하마드 술탄을 위해서 지은 무덤이라고 한다. 이 무덤은 1404년에 만들어졌고 이듬해에 중국 명나라 원정을 가던 도중에 병으로 사망한 티무르도 이 곳에 묻혀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티무르 일가의 관이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흑녹색의 관이 티무르의 관, 그 북쪽은 스승의 관, 우측과 좌측에는 각각 무하마드 술탄과 아들 샤 루흐의 관이다. 하지만 이건 위치만을 나타낸 관이고 실제 관은 같은 위치의 지하 4m 아래에 있다고 한다. 가이드에 따르면 티무르 관 위에는 ‘내가 이곳을 나갈 때 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라는 뜻의 글귀가 써 있다고 한다. 고고학을 연구하던 구 소련의 학자들이 우즈벡의 역사를 규명하려 티무르의 묘를 연 것이 1941년 6월 22일이었는데 흥미롭게도 티무르의 묘가 열린 바로 그 날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고 한다.
◇레기스탄 광장과 비비하눔 모스크
3개의 메드레세로 둘러싸인 레기스탄 광장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동양 건축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메드레세는 중세 이슬람의 신학교를 말하는데 신학과 함께 천문학ㆍ철학ㆍ역사ㆍ수학ㆍ음악 등을 연구하는 종합대학의 기능을 수행했지만 지금은 기념품 가게와 찻집들이 건물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모래 광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레기스탄 광장은 왕에 대한 알현이나 공공 집회가 이뤄지는 장소였다고 한다. 광장에 들어서자 웅장한 음악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환영을 받고 있는 티무르 왕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했다. 레기스탄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울르그벡 메드레세(중앙에서 바라볼 때 왼쪽), 틸라카리 메드레세(가운데), 쉐르도르 메드레세(오른쪽)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광활한 광장을 수호하고 있다. 그렇듯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중심지가 지금은 이름 그대로 모래가 날리는 한낱 광장으로 남아 있으니 역사의 무상함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가 보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궁전으로 티무르의 50명 아내 가운데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비비하눔 왕비를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수만 명이 땀과 피를 이 거대한 궁전을 위해 흘렸으니 당시 티무르의 비비하눔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그 많은 사랑을 받았던 비비하눔은 이 궁전을 건축했던 페르시아의 건축가와 사랑에 빠졌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티무르가 크게 진노해 비비하눔을 궁전 꼭대기 층에서 떨어뜨려 죽였으며 불륜의 주인공인 건축가는 야반 도주를 하고 말았다.
■종교의 도시, 부하라
부하라(Bukhara)는 산스크리트어로 ‘수도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대에는 불교가 그 이후에는 조로아스터교가, 그리고 8세기 이후에는 이슬람교가 번성했던 이 곳은 우리나라의 경주처럼 고즈넉하면서도 푸근한 느낌을 주는 정감 있는 도시다.
부하라는 처음 도시가 생겼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직적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지하 20m 깊이에서 불교 사원과, 주거지, 각종 도자기와 주화 등이 발견되고 있다. 기원 후 708년 부하라는 아랍인의 침입을 받아 언어와 종교가 이슬람화로 바뀌게 됐다. 부하라는 구 레닌 광장을 경계로 13세기 칭기스 칸의 침략 전에 생긴 북쪽의 구시가지와 그 이후에 생겨난 남쪽의 신시가지로 구분된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생겨난 도시답게 시내 곳곳에는 하우스(Hauz)라 불리는 연못 100여개가 자리 잡고 있으며 굼바스라는 이름의 전통 시장도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라비하우스를 중심으로 한 유적지
부하라의 구시가지 중심지에는 라비하우스(Labi Hauz)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다. 17세기 초에 만들어졌다는 이 연못 주변에는 나지르 디반베기 메드레세와 쿠켈다쉬 메드레세 등 신학교가 있으며 카라반 사라이(카라반의 고급 숙소였던 곳)와 디르베쉬 하나카(집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묵었던 곳)가 있다. 특히 하나카는 돈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코란의 가르침을 따랐던 이슬람 교도들의 따뜻한 배려가 엿보인다.
라비하우스 주위를 둘러보다가 굼바스라고 불리는 곳까지 걸어가 보았다. 굼바스란 고전적인 상가 건물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슬람 양식의 둥근 돔들로 만들어진 낮은 건물로 안으로 들어가면 기념품ㆍ악기ㆍ실크ㆍ양탄자를 파는 상점들이 모여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별 다른 쇼핑 센터가 없는 만큼 이런 굼바스에서 기념품을 사는 것이 가격도 저렴하고 품질도 좋다. 특히 우즈벡 사람들과 손짓 발짓으로 가격을 흥정하는 재미도 남 다르다.
◇아르크 성과 이스마일 샤마니 영묘
타직어로 ‘커다란 궁궐’이라는 뜻의 아르크 성은 18세기 부하라 칸 시대부터 왕들이 살던 곳으로 기원 전 4세기 초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별다른 장식이나 화려한 색감도 없이 마치 사막 한 가운데 모래로 지은 듯한 소박한 인상을 주는 이 성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완성됐다. 2,000년이 넘는 긴 세월에 걸쳐 역사의 풍파에 따라 하나의 성이 파괴되고 다시 건축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던 것이다. 정면에서 바라본 성의 모습은 황토색 벽돌로 매끈하게 쌓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800m에 달하는 성벽의 뒤쪽으로는 세월의 풍파로 인해 무너져 내린 곳이 드문 드문 눈에 들어 왔다.
이스마일 샤먀니 왕의 영묘는 이슬람 통치 초기인 9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부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앙아시아 건축물의 기념비적인 존재로까지 평가 받고 있는 이 영묘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흙벽돌의 무늬가 오묘한 변화를 일으키면서 색감도 노랑ㆍ갈색ㆍ분홍빛으로 수시로 바뀐다. 구운 벽돌에 상감 기법을 적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색깔이 달라진다는데 여기에 사용된 진흙 벽돌조차 수 천년을 견딜 수 있도록 낙타 젖으로 반죽을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부하라의 랜드마크. 칼리안 미나레트
12세기에 만들어진 칼리안 미나레트(첨탑)는 부하라의 상징과도 같은 탑으로 46m의 높이를 자랑한다. 부하라의 왕이 사형수를 자루에 담아 꼭대기에서 던지는 처형을 해서 ‘죽음의 탑’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이 탑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더 웅장하고 높게 느껴졌다.
13세기초 이곳에 쳐들어왔던 칭기즈 칸은 부하라의 여러 유적지를 파괴했다. 하루는 칼리안 미나레트에 와서 이 거대한 첨탑을 바라보다가 바람이 불어 그의 모자가 날려갔다. 모자를 줍던 칭기스 칸은 자신의 머리를 숙이게 만든 유일한 존재라며 이 탑을 절대 파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바람 덕분인지, 칭기스 칸의 순간적인 자비심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칼리안 미나레트는 여러 유적지가 파괴되는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돌의 나라’로 불리는 타슈켄트
타슈켄트는 우즈벡어로 ‘돌(Tosh)’과 ‘도시(Kent)’를 합친 말로 2,0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타슈켄트는 1966년 대지진 이후 새로 건설된 신시가지와 실크로드의 정취가 남아 있는 서북부 일대의 구시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신시가지의 중심은 티무르 광장이다. 칭기스 칸 이후 세계 정복을 꿈꿨던 아미르 티무르(1336~1405년)의 동상이 서 있는 광장으로 20세기 들어서서 공산권에 병합된 이후에는 칼 마르크스의 동상이 서 있었고 이후 스탈린, 레닌 등등의 동상으로 교체됐다고 한다. 현 이슬람 까리모프 대통령은 티무르를 통해 우즈벡의 민족 정신을 부활시켜 국가 재건의 정신적 토대를 이용하고자 티무르의 동상을 세웠다.
◇김병화 농장과 박물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 그리고 그들을 탁월한 리더십으로 이끌고 콜호스(집단 농장)를 경영하며 현지인과 고려인 모두에게 존경을 받던 고(故) 김병화씨. 타슈켄트 시내에서 약 20분 거리에 김병화 농장이 있다. 한국인들이라면 우즈벡 방문길에 반드시 찾게 되는 이 곳은 그 동안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에게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지만 강제이주 70년이 넘은 지금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난 채 황량하기만 하다.
김병화씨는 1940년부터 1974년 사망하기까지 농장장으로 콜호스를 이끌며 매년 쌀과 목화 생산에 혁신적인 성과를 거뒀으며 그로 인해 한때 많게는 1,924가구, 7,823명(고려인과 우즈벡인 포함)까지 속해 있던 대규모 농장이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와 함께 사정은 달라졌다. 1,500여명이던 농장의 고려인 중 상당수가 도시로 떠나 농장에 고려인들은 이제 800여명 밖에 남지 않았고 이마저 노인과 어린이가 대부분이다. 작고 초라한 김병화 박물관에 들어서면 김병화씨가 사용하던 탁자와 의자, 그의 단벌 양복들이 전시돼 있다. 그의 책상이 놓인 벽면에는 ‘이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는 문구가 크게 씌여 있다.
일제 치하에서 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연해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가야 했던 우리 민족이 다시 러시아의 강제 이주 조치로 이 머나먼 곳까지 오면서 얼마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수많은 혈육을 잃었을까.
고향이 전라북도 남원이라는 고려인 3세 장 에밀리아(69)씨는 “조국에 대해서는 어떤 원망도 어떤 아픔도 없다”면서 “죽기 전에 고향 땅 한 번 밟아보는 게 소원”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