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장애인 A씨는 지난 2008년 서울역 안에 앉아 있다가 한 남성을 만났다. 이 남성은 A씨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 뒤 밥을 사줬다. 밥을 먹으면서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고 한 뒤 대부업체 사무실로 데려가 200만원을 A씨 명의로 대출 받았다. 대출금은 친절한 남성이 챙겨갔다.
몇 달 뒤 대부업체는 대출금을 갚으라는 통지서를 A씨에게 보냈고 이후 지급명령 신청까지 했다. 주위에서는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을 통해 대출이 본인 책임이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A씨 측은 변호사를 고용할 여력이 안 돼 눈물을 머금고 대출 빚을 떠안아야 했다.
A씨의 사례에서 보듯 경제적 여건이 열악한 사회적 약자의 경우에는 국선변호사의 지원이 절실하지만 그동안 민사소송에서는 이 제도 자체가 도입되지 않았다. 형사사건의 경우 국가의 형벌권 행사에 마주 선 개인은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권리를 충분히 보장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지만 민사사건은 기본적으로 개인 간의 다툼이기 때문에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치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실질적인 권리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한 형사소송보다는 민사소송에 있기 때문에 민사에도 국선변호사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특히 경제 수준이 낮은 장애인의 경우 국선변호사 지원이 절실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물론 민사소송에서 국가의 사법지원 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법률구조공단의 소송구조제도를 통하면 변호사 수임료와 법률 상담 등을 지원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공단의 업무는 형사사건도 아우르고 있는데다 변호사를 바로 지원해주는 원스톱 서비스도 많지 않아 한계를 드러내왔다.
정부가 민사소송에도 국선변호사제를 전격 도입하기로 한 이유다. 법무부는 장애·고령 등 신체적·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을 우선 지원 대상으로 잡고 있다. 2013년 형사사건에서는 심신장애자·농아자 등 장애인 201명이 국선변호사 지원을 받았다. 통상 민사사건이 형사사건보다 4배가량 많고 소송 자체를 망설이던 사람들까지 국선변호사 신청을 할 것을 고려하면 최대 연간 1,000명 정도가 민사 국선변호사제도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장기적으로는 장애와 상관없이 경제적 어려움만으로도 국선변호사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어서 앞으로 사법보호 사각지대가 더욱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장애인은 범죄 피해를 당해도 변호사 선임 등 제대로 된 법적 대응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로 마음 놓고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많다"며 "민사 국선변호사가 도입되면 취약계층의 사법보호가 획기적으로 향상되는 것은 물론 장애인 대상 범죄 자체도 억제하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국선변호사 확대가 능사만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온다. 강신업 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는 "현재 형사사건 국선변호사의 수임료는 건당 30만~40만원으로 턱없이 낮아 충실한 소송대리가 이뤄지기 어렵다"며 "국선변호사제도를 확대하기 이전에 수임료를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