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타에는 조선인극장이 있다. 지금은 건물도 퇴락하고 활동도 미미하지만, 기실 조선인극장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란 여간한게 아니다. 우선 조선인극장의 연륜이 60여년을 넘어섰다는 점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그만한 세월을 축적한 연극단체란 전무하기 때문이다. 비단 장구한 연륜만이 아니다. 그간의 조선인극장의 족적은 그야말로 눈물겨운바가 한둘이 아니다.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끈질기게 예술혼을 불살라온 배우들의 집념도 눈물겹지만, 민족수난사의 압축판이랄 수 있는 구소련권의 교민 사회의 정서적 구심점을 이뤄가면서 우리말을 지키고 민족애를 주입시켜온 충정도 더없이 눈물겹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던 시절, 사회주의권의 교민들은 멀리 떨어져 살던 혈육의 소식이나 바깥세상 얘기들은 이들 조선인극단의 순회공연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이래저래 조선인극단은 낯선 땅 외로운 동포들에게는 여간한 즐거움이나 고마움이나 위안이 아니었다. 연전에 「KBS 해외동포상」을 첫번째로 수상한 것도 바로 이같은 궤적들이 반영된 결과라고 하겠다.
바로 엊그제, 그동안 어렵사리 극단을 이끌어왔던 인민배우요, 극장장이었던 김블라디미르의 부음을 접하며 깊은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극단의 일꾼이자 오랫동안 교분을 다져온 친지의 타계에 대한 충격이 우선 그것이었으며, 극단의 이면사를 알고 고려인들의 애환을 소상히 꿰뚫던, 말하자면 역사의 한 증인이 무대에서 사라진데 대한 허전함과 막막함이 또한 그것이었다. 그분의 작고 소식과 함께 나의 머리속에는 중앙아시아 문화교류활동 7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역시 몇년 전에 타계한 작가 한진씨의 작품을 고국땅에서 공연하며 즐거워하던 모습도 선하고, 우리 공연팀과 조선인 극장팀이 알마아타 근교 메데오 계곡에서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지내던 일도 그러하다.
이제 그분과 얽힌 사연들은 망각의 장으로 접어두게 되었고, 가난한 남의 나라의 국고로 실날같은 명맥을 이어가는 조선인극장도 그만큼 손실을 입게 되었다. 고국의 관심도 의지도 없는 속에 치러지는 한맺힌 중앙아시아 고려인 강제이주 60주년은 그래서 더욱 우울하고 쓸쓸할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