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산책] 영웅 대조영과 발해사

[토요산책] 영웅 대조영과 발해사 사극 ‘대조영’의 인기가 높아가고 있다. ‘주몽’과 ‘연개소문’이 사극의 본질을 망각하고 또다른 역사 왜곡으로 비난이 고조되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이 드라마라도 민족사를 빛낸 영웅의 한 사람인 대조영(大祚榮)의 일대기와 고구려를 이은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 건국사를 잘 그려서 보여주기 바란다. 지난 95년 7월에 백두산을 등정한 뒤 만주의 고구려ㆍ발해 유적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안내판마다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 ‘발해는 당나라 때 속말말갈인이 중국 동북과 연해주에 세웠던 지방정권’이라는 구절이 있어 통분했었다. 만주·연해주일대 호령한 대제국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건국한 뒤 약 230년 동안 오늘의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지배했으며 건원칭제(建元稱帝)한 당당한 대제국이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자 옛 고구려 지역은 큰 혼란에 빠졌다. 당은 고구려의 부흥운동에 겁을 먹고 수많은 유민을 요서와 중국 내륙지방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과 대조영 부자도 이때 요서 지방 차오양으로 이주당했다. 696년, 거란족인 송막도독 이진충과 귀성주자사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켜 영주를 함락시키고 도독 조문홰를 죽였다. 이 반란으로 당나라가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 대중상은 고구려의 유민 수만명을 이끌고 말갈족 지도자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더불어 차오양을 탈출, 동쪽으로 랴오허강을 건너 고구려 옛 땅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은 대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봉해 달래려 했으나 이들은 허울뿐인 명예직을 받지 않았다. 당은 회유책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무력 행사를 시도해 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로 하여금 이들을 추격해 섬멸하도록 했다. 당군과 쉴 새 없이 혈전을 벌이면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은 계속 요동으로 향했다. 그동안의 싸움에서 걸사비우는 전사하고 대중상도 행군 중에 병사했다. 최고지도자가 된 대조영은 출중한 용맹과 지략까지 겸비한 당대의 영웅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추격하는 당군을 유인해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대조영은 무려 5,000㎞의 대장정 끝에 698년 오늘의 지린성 둔화시 쑹화강 건너편의 동모산에 오동성을 쌓고 새 나라 대진국(大震國) 건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고 세웠으니 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 필자가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대조영이 첫 도읍지로 삼은 동모산의 오동성 옛터인 산성자산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이 산성의 성돌을 건물 기초석이나 담장용, 심지어는 돼지 우리를 짓기 위해 계속해서 빼내가는 바람에 성벽의 유적이 하나도 남지 않은 폐허로 변했다는 것이다. 당시 신라는 당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대동강 이남을 지배권으로 하고 있었기에 발해의 건국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당나라도 형식적이나마 고왕(高王ㆍ대조영)에게 사신을 보내 발해군왕(渤海郡王), 태자 대무예(大武藝)에게는 계루군왕(桂婁郡王)이라는 칭호를 주었지만 신라는 고왕에게 신라의 5품관에 불과한 대아찬 벼슬을 주는 모욕적 망발을 자행했던 것이다. 中 터무니없는 역사왜곡 말아야 발해가 건원칭제한 당당한 제국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80년 지린성 허룽현 용두산에서 발굴된 문황제의 넷째 딸 정효공주(貞孝公主) 묘비명에 부황을 가리켜 황제를 부르는 칭호인 ‘황상(皇上)’이라고 표현한 구절이 나온다. 또 ‘속일본기’에 따르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문황제가 자신을 가리켜 ‘천손(天孫)’이라 했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遺俗)을 지킨다’고 했으니 어찌 감히 고구려와 부여를 이은 이 같은 대제국을 가리켜 ‘말갈족의 나라’라느니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라느니 하는 망발을 되풀이하고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과 탈취 만행을 자행할 수 있는가. /황원갑 입력시간 : 2006/10/27 16:37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