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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한공주’ 등 10 성폭행, 왕따, 학교 폭력 등 청소년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하는 가운데 10대 범죄를 다룬 또 한 편의 영화 ‘방황하는 칼날’이 28일 서울 왕십리CGV에서 열린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그 베일을 벗었다. 이 자리에는 이정호 감독, 배우 정재영, 이성민, 서준영이 함께 했다.
‘우아한 거짓말’은 ‘은따’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던 소녀가 자살하자 언니가 동생이 왜 자살을 했는지에 대해 추적하고, ‘한공주’는 10대 성폭행의 피해자인 한 소녀의 아픈 기억을 그가 마치 때때로 떠올리듯 상처의 파편들을 퍼즐로 엮어 관객에게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반면 ‘방황하는 칼날’은 앞 두 영화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청소년 범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평범한 직장인인 상현(정재영 분)은 중학생 딸 수진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되자 범인을 찾던 중 가해자 중 한 명인 열여덟 살 남학생 철용이 당시 상황을 찍은 동영상을 보고 낄낄거리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자리에서 철용을 죽인다. 그리고 상현은 또 다른 공범자인 조두식을 찾아 나선다. 수진의 담당 형사인 억관(이성민 분)은 살해현장을 보고 범인이 수진의 아버지임을 알아차리고 그를 추적한다.
이정호 감독은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를 극단적인 악의 이미지를 표방해서 만들었다면 관객이 더 분노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청소년 성범죄 저지른 아이에게 분노를 느끼게 하는 게 옳은가 생각했고 이것이 소모적이라고 생각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어 “청소년 범죄가 형량이 낮기는 하지만 성인도 그렇게 높지 않다. 3년 정도인 것으로 안다”며 “이런 것에 대한 토론이 있어야 하지만 처벌 수위를 높이자는 의도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배려나 위로 같은 것이 법적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잃은 아버지가 범인들을 쫓으며 가해자가 되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보여주며, 딸 수진이 당한 사고의 장면과 죄책감 없는 가해자의 모습이 스크린에 보여질 때 분노하지 않을 관객은 거의 없어 보인다. 범죄를 저지른 10대 남학생들은 또래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신고를 하지 못하게 동영상을 찍고 가출한 여학생들의 포주 노릇까지 한다.
수진 아버지 역의 배우 정재영은 “다른 촬영장에서 보다 덜 까불었고, 원래 까부는 편인데 까불 일이 없었다”며 “(촬영을 하면서)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힘들었다. 부모의 입장에서 비교하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은 그런 문제여서 더욱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촬영 당시를 떠올렸다.
청소년 사건을 담당한 적이 있는 형사 억관은 상현의 사적인 복수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뉘우치지 않는 가해 학생들에게는 분노하는 형사다. 그는 마지막 장면 즈음에 의자에 앉아서 “17년간 피해자 가족에게 한 말이 바뀌지 않는다. 참아라”라고 동료 형사 준영에게 이야기하며 자조한다.
이성민은 “아버지 입장에서 감정 이입이 됐던 것은 (상현이)딸의 비디오 동영상 볼 때였다. 마음이 아팠다. 오늘 시사회에서 본 (상현이)눈 밭에 쓰러져서 딸의 환영을 만나는 신에서 울컥했다. 한번도 생각 안 했는데 내가 상현이라도 저렇게 할 것이다. 참아라 한다면 저는 참지 않을 것 같다. 상현과 똑같을 것 같다. 저라면 참지 못할 것 같다”고 전했다.
이 감독은“억관을 딜레마의 형사로 대변인으로 내세운 거다. 이런 사건 뉴스에서 접할 때는 나 같아도 그렇겠다고 많은 리플도 달리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법에 맡겨야지 하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고 그게 딜레마다”라며 해당 장면에 대해 설명했다.
또 정재영은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아버지 역을 했는데, 억관이 저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통화할 때 후련하냐고 위로가 되냐고 묻는데 상현은 대답 못 했다. 참고 안 참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라면 뭘 해도 위로 해소가 안 된다. 억관의 입장에서는 참아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나. 처벌 수위가 달라진다고 해서 위로가 더 되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방황하는 칼날’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어디까지가 원작이고 어디부터가 감독의 창작과 해석인지 감독에게 들어보았다.
이 감독은 원작 소설을 5번 정도 읽었다고 한다. 원작의 정서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고, 딸의 성폭행 장면을 가해자가 보는 장면을 보고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과 광장 대치 장면을 빼고는 가져온 것이 없다고 한다.
이 감독은 “원작 소설에서는 감정과 정서를 가져올만한 것이 독백이었다. 소설에서는 행동을 거의 하지 않고 숨어서 TV를 보고 고민한다. 이야기 가져올만한 것이 없었던 것 같고 주옥 같은 대사들은 다 쓰고 싶지만 너무 직설적이고 문어체라서 못 썼다.”라며 원작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설명했다.
비슷한 소재이지만 완전히 다른 기법으로 연출된 영화 ‘한공주’에 대해서 그는 “사회의 시스템이 잘못 됐다고 인지하지만 뉴스로 봐서 익숙해진 사건이라서 이제는 크게 놀라지도 않는 그런 상황이 돼 버렸다”며 “시스템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다. 책 소설 등 각 분야에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앳된 얼굴의 청소년이 저질렀다고는 믿기 힘든 강력 청소년 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요즘, 그들이 지은 죄가 고작 그 정도의 형량으로밖에 처벌되지 않느냐고 분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피해자만 억울한 것이 아니냐는 입장이다. 영화에서 억관이“그냥 (피의자)살려두자. 우리가 지켜 보자. 어떻게 살고 어떻게 자라는지”라고 말하듯 이런 것이 가해 학생에게 피해자 혹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인가.
피해자의 아픔을 낮은 목소리로 억누르며 이야기하는 ‘우아한 거짓말’과 ‘한공주’와는 달리‘방황하는 칼날’은 가해학생도 어린 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모든 처벌은 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해도 또 분노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해도 가슴 한 켠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분노에 다같이 공감하고 공분하게 하는 영화다. 4월10일 개봉. 122분. 청소년 관람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