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이 참 예쁘다. 그렇게 비싼 물건도 아니니 하나 샀다고 치자. 그러면 그 컵에 담을 음식이 필요하고, 음식이 있으면 음식을 넣을 찬장이 필요하고, 찬장이 있으면 그 찬장을 놓아둘 부엌이 필요하다. 또 부엌이 있으면 부엌을 채울 냉장고 같은 물건이 필요하고…. 결국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다.해서 얼마 전에 이승을 떠난 국회의원 제정구씨의 가훈은 「아무것도 사지 말자」라고 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했으니 참으로 인간은 욕심이 많은 짐승이다. 고 제정구 의원이 「아무것도 사지 말자」라는 말을 가훈으로 삼았으니 그 자손들이 물욕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자유로울 수 있는 혜택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려준 재산이야 별볼일 없겠지만,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천만금의 재산을 물려주면 뭘해」하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으니.
인터넷이다 디지털이다 해서 참으로 말이 많은 세상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수조원의 돈이 왔다갔다 하는 세상이니 어지럽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런 시점에서 느닷없이 가훈이란 단어를 들먹이다니 참 고리타분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가훈이라면 한 집안의 어른이 그 자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인생지침이 아닌가. 아니면 자신은 실천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살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담일 수도 있다. 그러니 어찌 교훈이 없을 수 있겠는가.
박치우라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 있다. 그 집안의 가훈운 「바르게 살자」이다. 너무 평범해서 듣기 지겨울 듯한 말이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말을 가훈으로 남길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얼마 전 별세한 코미디언 곽규석씨의 가훈은 이렇다. 「울지 마라,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 평범한 말이지만 실천하기 쉬운 가훈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어찌 보면 과시(?)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곽규석씨는 자손들에게 금기를 남겨두었다. 그것은 바로 「동정없는 세상」에서 살 각오를 하라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간단한 교훈 같지만 진정한 세상살이를 가르쳐주는 가훈들이 숱하게 많다. 조선시대 유명한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남긴 가훈은 이렇다.
「귀엣말은 듣지 말고, 새어나갈 이야기는 하지 마라. 남이 알까 두려워하는 것을 어찌 말하고 어찌 들으리오. 이미 말하여 놓고 뒤에 경계하는 것은 곧 남을 의심하는 일이다. 남을 의심하면서 말하는 것은 곧 지혜롭지 않은 일이다.」
누가 꼭 그러고 싶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남의 눈치를 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그런 가훈을 남기는 게 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지러운 세파를 넘긴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가훈이라는 생각도 든다.
누가 자손에게 거짓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가훈은 진리의 보고(寶庫)일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가훈이 없으면 자식들을 위해 솔직한 충고 한마디쯤 남겨두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