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와 멋의 고장, 전남 진도, 운림산방 묵향에 취하고… 남도제일 낙조에 시심이…

남종화 태두가 살았던 운림산방 속세와 거리둔 고고함 그대로
일몰 명소 세방낙조 전망대 서면 사자섬 등 다도해 절경이 한눈에
'신비의 바닷길 축제' 20일 개막… 한국판 모세의 기적 체험할 수도

진도의 풍광은 곳곳이 절경이지만 그중에서도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압권이다. /사진제공=진도군청

허림 등이 명함에 그려 넣은 유유자적의 삶, 서창정공.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태두, 소치(小痴) 허련이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다. 이후 5대에 걸쳐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화풍의 맥을 이어온 근대 미술사의 현장이다.

누군가 기자에게 "여행이나 관광이 자연경관과 문화재 구경에 국한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기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여행은 풍광과 문화에 곁들여 그 고장 사람들과의 교류와 대화가 전제돼야 한다. 이 같은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진도를 구경하며 섬에 깃든 예술과 정신을 배제한 채 진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주 기자의 발길은 남종화(南宗畵·북종화의 대립되는 개념의 문인화를 의미)의 향기와 구성진 소리가 이어지는 섬, 진도를 일순했다.

진도에 발을 들여 먼저 들른 곳은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태두, 소치(小痴) 허련이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다. 이후 5대에 걸쳐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화풍의 맥을 이어온 근대 미술사의 현장이다. 이 때문에 진도의 풍류는 운림산방 한 곳만 방문해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징표가 운림산방에서 가장 작은 작품인 명함에 그린 그림 서창정공(書窓情供·허림 作·1942)이다. 서창정공은 소치일가의 예술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소(小)우주다.

남농 허건의 명함에 그린 이 작품은 세 사람의 합작이다. 작은 명함에 허림은 피라미를, 허건은 바위를, 소상현은 화초를 그려 놓았다.

뒷면에 써 있는 글귀는 더욱 가관이다. 래래불래오거(來來不來吾去)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마라. 안 오면 우리는 간다'로 직역할 수 있는 이 글귀를 의역하면 '우리가 이 글방에 담소를 즐기고 있다. 남농의 제자 소상현은 빨리 와서 같이 놀자'는 내용이다.

자리에 목을 매고 갖은 지저분한 짓거리로 이름을 더럽히는 속세의 무리와는 섞일 수 없는 고고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허련은 양천 허씨 12대손으로 진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둔사에 머물던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웠다. 스승인 김정희가 죽은 후 허련은 고향으로 내려와 작품활동을 펼치며 한국 남종화의 맥을 형성한다.

운림산방에 전시된 대나무 그림에도 그의 정신이 묻어 있다. 잎이 위로 향한 댓이파리는 힘이 좋아 청죽(靑竹)이며 아래 잎이 처진 대는 비를 맞은 우죽(雨竹)이고 오른쪽으로 잎이 쏠린 대는 바람을 맞은 풍죽(風竹)이다.

풍류와 여유는 풍경화에서 정점을 찍는다. 산을 그리다 남겨둔 여백이 바위가 되고 폭포가 된다. 안개와 바람 역시 먹(墨)이 비켜가며 생성한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소산이다.

진도의 그림에 취해봤다면 바닷바람을 맞으며 풍광을 감상해봐야 한다. 진도의 풍광은 곳곳이 절경이지만 그중에서도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압권이다. 해 질 무렵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 사이로 침잠해 들어가는 일몰은 바다와 하늘을 주황색으로 물들인다. 세방낙조의 아름다움은 중앙기상대가 한반도 최남단 제일의 낙조 전망으로 선정했을 정도다.

이곳 전망대에서는 주지도·양덕도가 바라다보이는데 섬의 꼭대기에는 손·발가락처럼 생긴 화강암 바위가 우뚝 서 있어 손발가락섬으로도 불린다. 이 밖에 적을 응시하고 있는 사자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사자섬이라고 불리는 광대도의 풍경도 아름답다.

진도의 이곳 저곳이 모두 아름답지만 이맘때면 진도로 가는 발길이 더욱 빨라지는 것은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 때문이다.

신비의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2.8㎞의 바다 아래 모래언덕이 조수간만 차이에 따라 물 위로 드러나 길로 연결되는 현상이다. 신비의 바닷길은 지난 1975년 피에르 랑디 주한 프랑스대사가 진돗개 연구를 위해 진도를 방문했다가 바닷길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자국의 신문에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소개한 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해마다 바닷길 축제에는 50만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데 이 중 10%가 외국인일 정도로 해외에서도 유명하다. 올해는 '제37회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가 '만남이 있는 신비의 바다로'라는 주제로 이달 20일부터 23일까지 4일간 고군면 회동리 일원에서 열린다.

/글·사진(진도)=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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