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모럴해저드 극치인 공공기관 일자리 세습

공공기관 5곳 가운데 1곳이 고용세습을 명문화한 단체협약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이 왕조시대도 아닌데 시대착오적인 고용세습을 유지하고 있다니 놀랍다 못해 기가 막힌다. 이노근 새누리당 의원의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단협을 공개한 공공기관 179곳 가운데 33곳이 일자리를 세습하도록 규정한 단협 조항을 갖고 있다. 100여곳이 조사 대상에 빠진 것을 감안하면 고용 대물림을 제도화한 공공기관은 휠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용 악습 조항의 실태는 상상을 초월한다. 업무상 사망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세습 조항을 둔 공공기관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질병 같은 개인적 사유로 사망해도 일자리가 승계되고 심지어 정년으로 퇴직한 뒤에도 가족 채용을 우대하는 기관도 여럿이다. 노조 측에서는 사문화된 조항이라고 해명하지만 실제 그렇게 채용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공공기관은 취업 희망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선망의 직장이다. 안정된 일자리가 무엇보다 매력적이거니와 업무 강도에 비해 복지를 포함한 보수가 후한 편이다. 신의 직장이라고 비판을 받는 연유다. 이런 혜택도 성이 안 차는지 일자리마저 대물림하려 드니 공공기관의 도적적 해이의 끝이 어디인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노사 합의라고 해도 고용세습이 정당하지 않다는 법원의 판결도 이미 나와 있다. 울산지법은 지난 5월 현대자동차 일자리 대물림 조항을 사회 정의와 사회적 통념에 반한다며 무효라고 판단한 바 있다. 굳이 이런 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혈세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의 고용세습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해당 공공기관들은 공공 일자리를 사유화하고, 공정하고 균등한 취업 기회를 박탈했다. 취업 희망자들의 공분을 살 뿐만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공공기관이 현대판 음서제를 유지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방치하면 다른 곳으로 더욱 확산될 가능성도 높다. 총괄 감독을 맡는 기획재정부와 각 상급 부처들이 엄정 대처해야 할 것이지만 노조 스스로 악습 조항을 폐기해야 마땅하다. 그러지 않으면 외부로부터 개혁 압력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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