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과시? 허세? 예술 후원은 문화강국 지름길

■ 새로 쓰는 예술사 (송지원 외 6인 지음, 글항아리 펴냄)
신라 진흥왕부터 '메세나' 시작… 불상·청자·문학 등 부흥 이끌어
호암 "문화재는 국민의 얼굴"… 사재 털어 국보 유출 막고 공유
'후원' 덕에 영원불멸 가치 지켜

호암 이병철 회장은 사재를 3분의 1로 쪼개 삼성문화재단을 위한 기금으로 출자했고 40년에 걸처 수집한 미술품으로 호암미술관을 개관해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사회가 두루 공유하게 했다. 사진은 1982년 호암미술관 개관 당시 이병철 회장. /사진제공=글항아리

안동 김문이 지은 청풍계의 정자에서는 작품 감상은 물론 새로운 창작의 장이 열렸다. 사진은 겸재 정선의 ''청풍계''. /사진제공=글항아리


삼성그룹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1987)은 선친의 사랑방에 놓여있던 제주병(祭酒甁·제사용 술을 담는 병)을 보며 도자기에 대한 애정과 민족 문화유산 지키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38년 자본금 3만원의 삼성상회로 사업을 시작해 37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그룹을 만들어 낸 '재벌' 이병철이 가장 애착을 가진 것은 '돈'이 아닌 '예술'이었다. 애착은 생각과 말에 그치지 않았다. 1964년 삼성문화재단 출범을 결심한 그는 개인 재산 전체를 3분의 1로 나눠 그 중 한몫을 삼성문화재단의 기금으로 출연한 이른바 '재산 3분화'로 1970년대 한국사회에 충격을 던져 주었다. 호암은 연꽃 무늬가 새겨진 표주박 모양의 청자 주전자인 '청자진사 연화문 표형주자'(국보 제133호)를 특히 아꼈고, 자신이 관심 가진 도자기를 일본 사람이 사려고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값이 좀 비싸더라도 사들이곤 했다. 소유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긍지 없는 민족은 얼굴이 없는 것과 같다. 문화재는 바로 그 민족 그 국민의 얼굴이며 마음이다"고 한 그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 등 외국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40년간 수집한 미술품으로 용인의 5만㎡ 부지에 1982년 개관한 호암미술관은 한민족의 5,000년 역사를 예술로 집약해 놓은 예술의 극치였다. 선사시대 유물부터 순금제 가야금관, 당시로서는 국내 유일의 고려불화인 '아미타삼존도'(국보 제218호), 각 시기별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분청사기를 선보였다. 한국의 예술사를 한 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도록 돈과 시간과 열정을 들였고 또 이를 사회와 공유하고자 했기에 이병철 회장을 '한국의 메디치', '아시아의 로렌초'라 부르는 것이다.

책은 예술가와 예술작품 위주로 기술된 예술사를 '예술 후원가'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예술작품은 시공을 초월한 영원불멸을 가치를 갖고, 그것을 만든 예술가 또한 영생의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가는 '후원'에 힘입어 작품을 만들어왔다. 예술적 경지에서 만들어진 예술작품이라 해도 "작품의 '소통'이나 '유통'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이뤄지기에 생산과 향유 혹은 소비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현실이고, 예술가가 독자적으로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예술 후원을 뜻하는 단어 '메세나'는 로마 예술 발달에 기여한 로마제국의 귀족 '마에케나스'의 이름에서 유래했고, 예술 후원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자주 거론되는 가문이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집안인 까닭에 우리 역사에서의 예술 후원은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다. 이에 책은 한국의 예술사를 지탱해 준 후원자들을 집중 조명했다.

신라는 가야인 우륵을 받아들인 진흥왕부터 승려 양지를 후원해 불상을 만들게 한 선덕여왕, 지방 음악을 후원한 헌강왕 등 왕실의 예술 후원 모범이 귀족과 일반 백성에게까지 미쳐 문화강국을 이루게 했다. 무인정권기의 최씨 집안은 오히려 문학을 더 장려해 이규보 등이 문학 부흥에 앞장서게 했고, 팔만대장경 사업을 진행하게 했으며 고려청자 기술은 가장 세련된 순청자의 경지에 올라섰고 문인화를 지원하고 중국에까지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안동 김씨 가문이 지은 인왕산 아래 청풍계의 와유암, 청풍각, 태고정 등의 정자는 과시와 허세를 위한 게 아니었다. 이곳은 당대의 명화과 고적을 걸어두고 감상하는 곳이었으며 문화계 명사들이 교류하고 겸재 정선 등의 예술가가 후원을 받아 작품을 완성한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예술 후원을 재산은닉의 수단으로, 기업의 메세나 활동을 세제 혜택을 바라는 꼼수로 보는 시선도 없지 않다. 하지만 몇몇 부정적 사례를 제외하고 본다면 예술 후원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며 우리 시대의 문화융성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요소임을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2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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