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승장구하던 구리가 다음으로 만난 한국 기사는 유창혁이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아내의 변사사건 이후로 유창혁은 기나긴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구리는 이 기회에 유창혁까지도 격파하여 자신의 성가를 한껏 드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흑번인 유창혁이 펼친 포석은 전형적인 중국식 포석. 이에 맞서서 구리가 펼친 것은 평소에 유창혁이 애용하는 패턴이었다. 2연성에서 백6으로 크게 굳히는 이 포석이 그것이다. 흑9에 손을 빼고 10으로 걸친 것은 평소에 구리가 자주 실험하는 형태. 백14까지는 필연의 진행이다. 여기서 5분을 숙고한 유창혁은 실리의 요충인 15를 두었는데…. “유창혁이 오늘도 별로 좋은 컨디션이 아닌 모양입니다.” 검토실의 양재호9단이 하는 말이었다. 흑15가 완착이라는 얘기. 어떤 식으로든 우변을 두는 것이 정상적인 돌의 흐름이라는 해설이었다. 얼마 전에 소개한 구리와 송태곤의 대국보에서는 송태곤이 참고도1의 흑1,3으로 공격한 일이 있다. 양재호가 제시한 흑의 모범 답안은 참고도2의 흑1,3이었다. 백16이 노타임으로 놓였다. “절호점입니다. 이곳을 백에게 빼앗겨서는 흑의 포석 실패입니다.” 양재호의 단언이다. 이곳을 백에게 허용해서는 원래 중국식 포석을 펼친 이유가 여지없이 지워졌다는 설명이었다. “최종 결과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흑이 이 바둑을 이기려면 무수한 가시밭길을 거쳐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