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다가오면서 여당과 야당이 친 서민 복지정책을 경쟁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두 당 모두 보편적 복지의 확대라는 포퓰리즘에 몰두하고 있는듯해 심히 걱정스럽다. 장기간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지금 유럽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음을 다 보고 알면서 한국의 정치인들은 애써 그 흐름을 외면하고 있다. 눈앞보다 먼 어깨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그런가. 아니면 국가보다 개인의 이익이 우선해서 인가.
한국의 문화지원정책 역시 같은 맥락에서 헤매왔다. 한동안 선택과 집중을 강조하면서 능력 있는 개인과 단체에 유의미한 지원을 집중하는 이른바 다액소건주의를 정책으로 삼는 듯하더니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의 소리에 겁먹어 다시 소액다건주의로 회귀했다. 소액다건주의는 사실상 문화의 보편적 복지정책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규모가 해마다 줄어들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소액다건주의라는 문화정책의 포퓰리즘 때문에 문예진흥이라는 본래의 취지는 이제 정말로 구현하기가 어렵게 됐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예산의 편성과 집행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국제적인 경쟁력이 없으면 이제 국내에서도 생존이 어렵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가 아닌가. 글로벌 시대에 부응하는 문화예술의 경쟁력은 용기 있는 지원정책으로 강화될 수 있다. 소수의 뛰어난 개인이나 단체, 또는 프로그램을 집중 지원해 경쟁력 있는 문화예술의 생산을 추동하는 게 옳다. 예술은 완성도가 높을 때 시민에게 감동과 행복감을 제공할 수 있다. 다수에게 골고루 찔끔찔끔 나눠주는 지금의 지원 정책은 평범한 태작의 생산만 부추길 뿐이다. 우리의 문화예술지원정책은 불행히도 후자 쪽이다. 지원 받은 개인이나 단체가 조금 잘해서 경쟁력이 생겼다 싶으면 지원을 중단한다. 그러니까 잘하면 지원을 못 받는다는 역설이 생기는 것이다. 문예 진흥을 위한 정책이 오히려 열등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냉철하게 자문해볼 일이다.
정부의 문화예술지원정책과 방향은 문화예술인들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자체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유권자의 권리로 두 당에 묻는다. 그대들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기는 하는가. 그대들은 문화예술지원정책에도 보편적 복지주의를 적용하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