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이 끝내 물러났다. 형식은 사퇴이나 사실상 해임이다. 공직자가 대형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는 행위는 당연한 것 같지만 이번 일만큼은 못마땅하다. 정치적 계산이 고약하게 개입한 탓이다. 우선 시간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최 전 장관이 최초로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한 때가 지난 19일. 9ㆍ15 정전 사태로부터 나흘만이다. 진상 조사고 뭐고 따져볼 틈도 없었다. 당초에는 '사태 수습이 먼저'라던 최 전 장관이 입장을 바꾼 데에는 정치권의 직간접적인 압력이 주효했다. 가장 먼저 책임론을 흘린 곳은 야당도 여당도 아닌 청와대. 사태 발생 직후 수석급 비서관들이 연이틀 '책임지고 물러나는 게 도리'라는 입장을 밝히고 야당까지 가세하자 사퇴는 기정 사실로 굳어버렸다. 한국 13일 vs 미국 18개월 사태 수습보다 문책을 서두른 이유를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반된 민심에 연달아 터지는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 의혹을 덮고 넘어갈 희생양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서울시장 보궐선거라는 정치 일정도 전광석화 같은 사퇴의 배경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비용이다. 2003년 미국 북부와 캐나다 일대 정전 사태로 한 달 넘게 시도 때도 없이 암흑 생활을 강요받았던 미국이 진상 조사와 개선책 마련, 책임자 징계까지 걸린 시일이 18개월. 비슷한 시기에 런던 정전 사태를 당했던 영국도 진상 파악에만 1년 반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한국은 불과 13일 만에 정책책임자를 잘라냈다. 미국이나 영국이 한국보다 책임을 덜지는 사회일까. 정전 피해를 입은 주요국가들이 진상을 파악하는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이유는 자명하다.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비용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의 경우는 국민경제가 물어야 할 비용은 뒷전이다. 당장의 정치적 계산이 우선일 뿐이다. 최 장관의 사실상 해임은 그동안 MB 정부가 내세웠던 '책임 행정'에도 걸맞지 않는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전국을 휩쓴 구제역 파동에서도 장관 책임론이 빗발쳤으나 MB 정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태를 수습한 뒤 옷을 벗겠다'던 유정복 전 농림식품수산부 장관은 약속대로 구제역이 일단락된 뒤에야 장관직을 던졌다. 왜 이번에는 다른 잣대가 적용된 것인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전기에서 정치를 빼라'는 것이다. 장관을 내치면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대위만족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곧 포퓰리즘이다. 과연 이 정권이 전기에서 정치를 지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출범부터 전기의 포퓰리즘으로 재미를 봤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당선인 시절의 MB는 수년 동안 논란의 대상이던 대불 공단의 전봇대를 '뽑으라'는 단 한마디로 국민들의 환성을 샀던 적이 있지만 그 자체가 '전기 포퓰리즘'의 상징격이다. 전신주란 하나를 옮겨도 전압과 전력 소통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설치나 변경에는 지경부와 환경부, 지자체, 한전 등의 합의가 있도록 규정해놓은 제도가 당선인의 한마디로 무력화했던 기억부터 반성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전기에서 정치를 빼라 전기는 국민의 재산이다. 국민들이 발전원가보다 낮은 전기료를 펑펑 쓴다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한전이 깔아놓은 막대한 부채를 갚을 사람들도 결국은 민초다. 기왕에 발생한 사고라면 감정으로 다스리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보다는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권과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사상초유의 순환정전을 맞아 몇 사람 갈아치우고 넘어간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경제에 쌓인다. 사고도 반복될 수 있다. 차분하게 수습책 마련에 나설 때다. 제대로 된 대책을 원한다면 당장 전기에서 정치를 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