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0월10일] 아먼드 해머


팽팽한 긴장 한복판에서 그는 돈을 벌었다. ‘무역의 키신저’로 불렸던 미국 사업가 아먼드 해머(Armand Hammer)가 그 주인공. 1898년 뉴욕의 유대계 러시아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해머는 의대 재학 중이던 1919년 의사인 부친이 운영하던 중소 제약회사의 경영을 일시적으로 맡아 백만장자에 올랐다. 금주법 아래에서 위스키 맛을 낼 수 있는 쇼가징크액(알코올)의 주문이 폭증하자 인도와 피지의 원액을 독점, 100만달러의 이익을 거둔 것.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625달러였던 시절이다. 의대를 졸업한 1921년, 소련의 대기근은 그를 사업가로 변신시켰다. 의료구호단을 이끌고 방문한 소련에서 굶어죽는 참상을 보고는 미국산 곡물을 사들여 수만의 생명을 구해내 레닌에게서 미국인 사업가 1호 면허를 받았다. 결제대금인 러시아산 모피와 상어알, 광물, 러시아 황실의 미술품은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며 그에게 부를 안겼다. 동토에 연필ㆍ석면공장을 세우고 골수 반공주의자인 헨리 포드의 소련 투자를 주선한 것도 이 무렵이다. ‘스물셋의 나이에 레닌과 친교를 맺었다’는 전력은 평생 밑천으로 쓰였다. 냉전이 한창일 때도 소련은 그의 전용기를 환영했다. 루스벨트와 케네디ㆍ존슨ㆍ레이건, 흐루쇼프ㆍ브레진스키ㆍ고르바초프 등은 미소관계가 막힐 때면 그를 찾았다. 경제개발에서 나선 중국의 덩샤오핑이 가장 먼저 찾은 미국 자본가도 해머다. 동아건설이 시공했던 리비아 대수로도 그의 아이디어다. 제조업과 어음할인, 백화점, 미술품 매매, 목축, 방송국, 석유업(옥시덴탈)에서 성공했던 해머는 1990년 10월10일 92세를 일기로 사망하기 전 펴낸 자선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쁜 사업이란 없다. 나쁜 사업가가 있을 뿐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