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숨는 정부… 혼란 커지는 노동시장] <하> '제자리걸음' 임금피크제

임금피크제 없이 정년연장 땐 생산성↓… 정부가 도입근거 마련해줘야
60세 정년 13개월 앞두고 강제규정 없는 법조항 탓
피크제 도입 17%에 그쳐
기업 상황 맞게 임금개편 궁극적으로 연공성 줄여야

최경환(왼쪽)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9월2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최 경제부총리는 이날 "임금피크제 적용 근로자에 대한 지원을 연간 840만원에서 1,080만원으로 늘려 근로자들이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지만 임금 지원만으로는 임금피크제를 확산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연합뉴스

"정년 60세가 코앞이라 준비할 게 한둘이 아닌데 노조가 임금피크제 도입을 반대하고 있어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

"임금체계를 손대지 않은 채로 오는 2016년에 60세 정년 연장법이 시행되면 신입직원 채용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

정년 60세 시행을 불과 13개월여 남겨둔 가운데 노조의 반대에 부딪혀 아직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지 못한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정년 연장에 따른 인건비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 임금피크제인데 노사 합의 없이는 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정년만 연장될 경우 기업의 비용이 상승해 고스란히 생산성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정부는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다.

◇60세 정년 연장 앞두고 임금피크제 도입 17% 불과=지난해 5월 개정된 '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고용 촉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16년부터 근로자 수 300명 이상 사업장과 공공기관 등은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정해야 한다. 1년 뒤인 2017년부터는 나머지 사업장과 정부·지방자치단체도 정년 60세 시행대상에 포함돼 우리나라의 모든 근로자는 법적으로 정년 60세를 보장 받는다. 문제는 지난해 말 고용노동부 조사를 기준으로 전체 사업장의 81.7%는 정년제도가 아예 없고 정년이 있는 곳 중에서도 54.5%는 58세 이하라는 점이다. 정년 연장은 단순히 비용 문제를 떠나 채용과 승진·배치 등 인사정책 전반에 영향을 주는 이슈인 만큼 단단한 준비가 필요한데 현 상태로라면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등 떠밀리듯 정년이 생기거나 연장돼 적잖은 혼란이 예상된다.

기업들이 정년 연장을 주저하는 것은 비용 부담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 대부분은 오래 일할수록 많은 임금을 주는 연공급 임금체계를 도입하고 있다. 이번 정년 연장의 가장 큰 수혜를 보는 55세 전후 근로자는 직급도 높고 근속연수도 긴데다 자녀들의 대학 학자금까지 회사에서 지원 받는 경우가 상당수다. 일정 나이 이상부터는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와 정년 연장이 같이 가야 하는 이유다.

◇임금피크제, 강제 규정 없는 비대칭적 법 조항이 혼란 불러=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일부 기업들은 이 같은 이유로 법 시행보다 앞서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삼성전자는 정년을 55세에서 60세로 늘리는 대신 56세부터 매년 임금을 10%씩 삭감하기로 했고 GS칼텍스는 58세부터 기존 급여의 80%만 준다.

그러나 현대차 등을 비롯한 대다수 사업장은 임금피크제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고용부에 따르면 정년제도가 있는 100명 이상 사업장의 임금피크제 도입률은 지난 2011년 12.3%, 2012년 16.3%, 2013년 17.0%로 저조한 수준을 맴돌고 있다. 직접적인 원인은 비대칭적인 법 조항에 있다. 지난해 개정된 고령자 고용촉진법은 정년 60세 시행 시기와 대상은 구체화한 반면 '사업주와 노동조합은 (정년 연장에 따라)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별다른 강제 조항을 두지 않았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시간만 지나면 정년 60세를 자동으로 얻는 상황에서 굳이 임금 삭감을 감수하며 임금피크제 도입에 찬성할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임금피크제를 수반하지 않는 정년 연장이 이뤄질 경우 기업들의 생산성 악화는 불 보듯 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기업이 비용부담을 줄이려 신규채용 축소에 나설 경우 청년실업은 증가하고 기업 내 근로자 평균연령은 높아져 활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대기업 인사팀의 한 관계자는 "정년을 앞둔 직원에게는 연간 임금과 복지비 등 최소 1억원 이상이 들어간다"며 "이 돈이면 신입직원 세 명을 뽑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비정규직을 늘리거나 근로자들에게 희망퇴직을 강요하는 부작용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가 앞장서 근거 마련하고 임금체계 개편 유도해야=기업들은 이에 따라 임금피크제 확산을 위해 정부가 더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정년을 연장한 기업은 임금피크제도 도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변화 없이 임금피크제만 시행하면 근로자 임금이 줄어드는 불이익변경에 해당해 반드시 노사가 합의를 해야 한다. 합의 없는 취업규칙의 불이익변경은 근로기준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를 함께 도입하면 꼭 근로자에게 불리하다고만 할 수 없는 만큼 기업이 이같이 조치하더라도 불이익변경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정부가 내년부터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 소속 근로자에게 1인당 840만원에서 1,080만원으로 지원금을 올리기로 한 대책 역시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는 연차별 임금 삭감률이 최소 10% 이상인 곳만 지원하는데 기준이 까다로워 실제 이용률이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궁극적으로는 임금피크제 도입을 뛰어넘어 임금의 연공성을 줄이는 방식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지만 연세대 교수는 "기업의 상황에 맞는 다양한 임금체계를 도입하며 연공성을 줄여가야 한다"며 "아울러 정년 연장으로 재직기간이 길어진 장년층 근로자를 위한 적합직무 개발에도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