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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큰 잡음 없이 KB금융지주 회장 선출과정이 마무리됐지만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KB 노조는 내부 출신이 임명됐다고 환영했지만 윤종규 내정자 역시 '정통 KB맨'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지난 십수년 동안 KB 스스로 조직을 이끌 진정한 역량을 지닌 내부 인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KB금융의 한 관계자는 "외풍과 코드인사 등이 버무려진 채 이뤄지다 보니 정통 내부 인재는 사라졌다"며 "국민은행 노조가 어느 정도 근무한 기간이 있다면 내부 출신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은 것은 일종의 블랙코미디"라고 지적했다. 사람의 힘으로 먹고사는 금융사가 내부 인재를 키워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비단 KB뿐만이 아니다. 4대 금융그룹 대부분이 차기를 이을 확실한 CEO감이 거의 없고 하물며 분야별 '스페셜리스트'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회사로 도약하려면 국제적 감각을 갖추고 국제금융시장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자산운용 전문가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불행히도 우리 금융사들은 국제시장에서 인정받을 만한 전문가가 없다.
그나마 외환위기 이후 합병에 따라 화학적 결합이 되는 과정에서 조직 내 이질감이 없어지지 않다 보니 채널 문제를 비롯한 내부 갈등이 사라지지 않았고 그나마 있던 인재들도 떠밀려 나갔다. 그만큼 우리 금융산업은 '인재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 금융산업의 후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금융계 어른'도, 쓸 만한 뱅커도 없다=윤 내정자는 작고한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이 영입했다. 행장과 최고재무책임자로 손발이 척척 맞았던 두 사람은 뱅크인터내셔널인도네시아(BII)를 성공적으로 인수했다. 그러나 법인세 분식 문제가 발생했고 김 전 행장은 '조금은 억울한 징계'를 받고 은행을 떠났다. 강정원 전 행장이 바통을 이어받자 윤 부행장을 비롯한 상당수가 물갈이됐다. 국민은행 내부 출신은 단 한 번도 중용되지 않았다. 이런 흐름은 10년 넘게 이어졌다. 실력이 아닌 코드인사가 계속됐다. 이번 KB금융 회장후보 최종 4인에 회장 바로 아래 단계인 지주사 사장이나 은행장 출신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재 부족은 KB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금융산업에는 '어른'도, 쓸 만한 뱅커도 태부족이다.
세월호 사고는 '관피아'라는 낙인 효과 끝에 민간 중용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정작 민간 중용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켰다. 시장의 기대를 100% 충족시킬 만한 전문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차기 은행연합회장 선출 구도가 딱 그렇다. 2000년 이후 우리 금융산업에서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긴 이들은 많았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 라응찬 전 신한금융 회장 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금융인이었지만 차기 연합회장 후보로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하나같이 불명예 퇴진의 낙인이 찍힌 결과다. 본인들의 과욕도 원인이지만 금융당국도 이들이 명예롭게 은퇴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우리 금융산업에는 스타 최고경영자(CEO)가 없다. CEO들은 하루하루 징계 받기에 급급하다. 국민으로부터 신뢰 받으려야 받을 수가 없다.
CEO뿐만이 아니다. 저금리 시대에 자산운용 능력이 중요시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되는 플레이어가 없다. 하물며 삼성 금융계열사에도 손꼽히는 인물이 드물다. 방법은 해외 자산운용사를 통째로 인수하는 것밖에 없다.
국제금융시장에서 통용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변양호 전 보고펀드 대표가 정부의 금융정책국장 시절 스타플레이어로 통했지만 여기서 끝이다.
오히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리먼브러더스가 인수합병(M&A) 시장에 나오고 산업은행이 매수주체로 부각되자 "리먼브러더스를 실사나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나올 정도로 글로벌 경쟁력은 뒤처져 있다.
◇인재등용·육성의 기틀 마련해야=KB금융 사태는 금융지주 CEO 승계 이슈를 공공의 영역으로 끄집어내는 계기가 됐다. 윤 내정자에게 거는 기대 중 거버넌스(지배구조) 안정 프로그램이 첫손에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4대 금융지주 가운데 의미 있는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과 CEO 승계 프로그램을 갖춘 곳은 신한금융이 유일하다. 그러나 신한금융도 기틀을 마련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아 안착 여부를 지켜봐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씨티은행 차기 행장 선출구도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15년간 장기재임했던 하영구 행장이 자리를 내놓았지만 아무런 잡음도 들리지 않았고 박진회 현 부행장으로의 연속성이 확보됐다. 체계적인 CEO 승계 프로그램이 있기에 가능한 결과다.
또 민관이 함께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관피아 논란은 사실 따지고 보면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전문성이 결여된 낙하산 인사가 지주사 수장으로 내려오는 관행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관료의 역량이 시장에 흡수되는 것을 막는 것은 국가적 낭비다.
고시를 통과해 정부기관에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엘리트 관료, 특히 금융관료들은 분명 산업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금융선진국인 미국에서 로버트 루빈이나 헨리 폴슨처럼 민관 이동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회장이나 행장에 '무늬만 공모' 형태로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젊은 관료들이 상무나 부장급 등으로 옮겨 기존 인력들과 경쟁하면서 인재 풀 속으로 들어가면 민간의 스페셜리스트를 키우는 데 훨씬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윤창현 금융연구원장은 "사람은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써먹는 것도 중요한데 현재 진행되는 관료 배제 흐름은 잘못된 것"이라며 "시장 출신과 민간 출신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열린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