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4월 21일] 골드만삭스의 e메일

세일즈맨이라면 모를까 미국 직장인의 명함에서는 좀처럼 휴대폰 번호를 볼 수 없다. 물어보는 것 자체도 실례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전통이 강한 미국에서 휴대폰은 사적 영역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휴대폰은 전화보다는 정보 검색용으로 더 많이 활용된다. 블랙베리ㆍ아이폰 같은 스마트폰의 등장은 e메일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는 기폭제가 됐다. 한국이 인터넷 강국임에도 스마트폰 보급 속도가 미국보다 뒤처지는 이유 역시 휴대폰의 활용도 차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월가에서 일하는 금융인들은 스마트폰 중독자들이다. 스마트폰이 없다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는 한 실시간 달라지는 시장 정보에 눈뜬 장님이나 다름없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메신저가 정보 전파의 수단이라면 e메일은 월가의 정보소통 채널이다. 월가를 오가는 e메일은 종종 대형 금융스캔들이 드러나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왔다. 이번에 문제가 된 골드만삭스 사건의 경우 한 트레이더가 무심코 보낸 e메일에서 사기 혐의의 정황이 포착됐다. 골드만삭스 직원으로는 유일하게 제소된 패브리스 투레는 아바쿠스라는 이름의 부채담보부증권(CDO)을 판매하기 직전인 지난 2007년 1월과 2월 "CDO 비즈니스는 끝난다. 대피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다"며 시장 비관론이 가득 찬 메시지를 트레이딩 데스크와 프랑스 친구에게 보냈다. 앞서 지난해 미 증권거래위(SEC)가 미 최대 서브프라임 모기지 은행인 컨트리와이드의 안젤로 모질로 전 최고경영자(CEO)를 제소하는 단서도 e메일에서 찾았다. 그는 회장에게 "우리는 높은 실업률과 주택가격 하락으로 장님 비행을 하고 있다"며 위기의 실상을 털어놨다. SEC는 이를 토대로 모질로 CEO가 회사 부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투자자들을 속인 데 대해 사기혐의를 적용했다. 두 사람 모두 당시 무심코 보낸 몇 줄의 글귀가 자신을 옭아매는 부메랑으로 돌아올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SEC는 리먼발 금융위기가 폭발한 이후 1년6개월 동안 광범위한 내사를 벌여 메릴린치 등 6개 금융회사를 제소했거나 제소 전 화해절차로 벌금을 매겼다. 문제가 있을 만한 금융회사는 죄다 뒤졌다는 이야기다. 내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자신이 남긴 기록을 남이 엿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섬뜩하지만 월가의 e메일이 묻힐 수 있는 은밀한 거래와 추악상을 포착하는 단서가 된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