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이 만난 사람] 이희범 경총 회장

새 정부 최대과제는 일자리… 기업 투자 이끌어내야 가능
고용없는 성장 비판 있지만 결국 기업에서 일자리 나와
경제민주화는 세계적 현상 한쪽으로만 쏠려서는 안돼
박근혜 당선인의 이공계 마인드 정책 수립·실행 도움 될 것



"박근혜 당선인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대통합과 일자리가 창출이 한국 사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합리적으로 잘해 나가실 것으로 믿습니다."

18대 대통령 선거 바로 다음날인 지난 20일 이희범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을 서울 남대문로의 STX남산타워 회장실에서 만났다. 이 회장은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산업자원부 장관과 한국무역협회장을 지내다 전문경영인으로 변신해 현재 STX중공업ㆍ건설 회장과 경총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10년간 민관을 거치며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이 회장은 경제관료로는 드물게 공대 출신(서울대 전자공학과 68학번)이다. 서강대 70학번인 박 당선인과는 전공도 같고 나이도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한국 최초 이공계 출신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바도 남다른 듯했다.

이 회장을 만나 경제ㆍ경영계의 리더로서 박 당선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박 당선인에게 빌려주고 싶은 지혜가 있으면 들려달라고도 했다. 그러자 이 회장은 "합리적으로 잘하실 것"이라며 얘기를 시작했다.

"지난주 말에는 박근혜 당시 후보가 거리 유세하는 곳 근처에서 점심 약속이 있었어요. 그래서 유세장에 가 박 후보가 무슨 말씀을 하나 유심히 들어봤습니다. 11월8일 경제 5단체장과의 간담회 때도 느꼈지만 박 당선인은 여러 가지 정책을 합리적으로 꿰뚫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역할을)잘해나가실 거예요."

이번 정부 들어 과학기술 전담 부처가 없어졌다. 나로호의 거듭된 실패도 이 같은 정책 방향에서 비롯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이 될 박 당선인에게 남다른 기대가 있냐고 묻자 이 회장은 "이공계 마인드 자체가 정책 수립과 실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을 보십시오. 개발경제를 해오다가 이공계 출신 지도자들이 등장하면서 기술정책을 씁니다. 박 당선인의 산업정책은 기술을 강조하는 방향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업의 기술 발전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이번에는 드라마틱한 이벤트가 유난히 많았던 18대 대선 과정을 어떻게 봤는지 물었다.

"세대 간의 의견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저희 가족도 의견 통일이 안 됐으니까요. 그러나 선거가 끝난 뒤 승자가 포용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고 패자가 승복과 축하의 뜻을 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찡했습니다. 이 같은 정치 성숙도가 국가 브랜드에도 플러스 요인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어 "이번 대선에서 급격한 개혁보다는 한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기존 질서를 개선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민심이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새누리-민주 양강 구도에서 제3의 인물이 나타나고 거대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바람이 뭘까 생각해봤어요. 기존 정치에 대한 불만과 불신, 그리고 새 시대를 열자는 열망이겠지요. 그러나 급격한 개혁을 바라지 않는 민심은 결국 그 바람을 잠재웠습니다."

아울러 이 회장은 "박 당선인은 역대 최다득표로 당선됐지만 문재인 후보 역시 48%의 지지를 받은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면서 "박 당선인이 얘기하는 통합과 소통이라는 단어가 산뜻해 보였고 임기 동안 이를 실천할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에게 경제관료 출신 기업인으로서 경제 문제에 대해 박 당선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물었다. 첫째로 단연 관심거리인 경제민주화 이슈에 대한 질문에 이 회장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요구도, 양극화도 모두 세계적인 현상"이라며 말을 시작했다. "경제민주화뿐만 아니라 복지와 분배를 강조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상생협력을 추구하는 것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개념도 과거와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기업들도 일감 몰아주기나 골목상권 침해에 대한 반대 목소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업 정책도 과거 패러다임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쪽으로 쏠림은 곤란합니다. 기업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경제민주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목적이 돼야 합니다."

그는 삼성ㆍ현대차 등 특정 그룹에 경제력이 과다하게 집중되고 있다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혔다. "이 역시 세계적인 현상이고, 특히 한국은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파도를 넘기 위해 구조조정을 하면서 그렇게 된 측면이 있다"는 설명이다. "삼성과 현대차그룹은 뼈를 깎는 노력과 구조조정을 거쳐 세계적인 기업이 됐습니다. 산업정책을 통해서 이들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 산업의 역사를 보면 조립산업이 먼저 컸기 때문에 대기업이 큰 것인데 이제 와서 이들을 끌어내릴 게 아니라 부품ㆍ소재 분야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정책을 펴줄 것을 박 당선인에게 당부합니다."

주요 대기업 오너 경영인들의 경영권 승계도 다음 정권에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오너십 승계는 기업이 실력을 유지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부의 대물림 문제는 일반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부분이다. 사회의 동의 하에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을지에 대해 이 회장은 하나의 정답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우선 오너가 있는 기업과 주인 없는 기업 중 어떤 게 좋으냐의 문제를 보겠습니다. 세계 각국의 연구자들이 발표한 논문을 보면 오너십이 있는 기업이 더 잘 된다는 보고서가 많습니다. 저는 한국 기업 역시 오너십이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승계 문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겁니다. 민주주의가 뭡니까. 이런저런 의견을 모아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정치고요."

다음 정부는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큰 과제다. 청년실업 문제도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하다. 이 회장은 일자리에 대한 대화에서 특히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새 정부가 제일 강조해야 할 게 일자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일자리가 생기느냐.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외국 기업이 한국에 들어와 본사와 지점을 만들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최선의 일자리 정책은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그래도 결국 일자리는 기업에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간 왜 기업들의 투자가 저조했을까를 묻자 이 회장은 "투자의 성과에 대한 전망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기업이 투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규제를 푸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기술 개발 지원, 정보제공 등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고 덧붙였다.

노사문제를 전담하는 경제단체인 경총 회장으로서 박 당선인에게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가장 첨예한 노동 이슈인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방안은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라고 잘라 말했다. "비정규직하면 대기업을 떠올리는데 대기업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는 전체의 5.2%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중소ㆍ중견기업에 있어요. 그런데 비정규직이 왜 생기냐, 대기업 고용시장의 경직성 때문에 발생한다고 봐야 합니다. 비정규직이 나쁘다고만 말하지 말고 근원에 대한 처방을 해야 합니다. 그 처방은 바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유연한 시장을 만드는 것이 고용을 늘립니다. 외국의 사례입니다."

경총은 올 들어 한글날 휴일 재지정, 정년연장 법제화 등 정치권이 다룬 노동 이슈에 대해 줄곧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 회장의 입장을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그는 "세상에 놀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면서 "생산성 향상이 전제돼야 휴일 확대를 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가 과거 주당 40시간 근로제를 논의하던 때의 노사정위원회 참가 당사자인데요. 당시 법정 공휴일이 너무 많으니 제헌절과 식목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그날들은 단지 공휴일이 아닐 뿐 의미와 가치는 살아 있습니다. 그날이 휴일이던 시절에도 일하는 곳은 일했어요. 이는 기업 입장에서는 휴일 근로수당 지불의 문제가 됩니다. 휴일을 줄인지 얼마나 됐다고 한글날을 휴일로 재지정합니까. 휴일 늘리려면 생산성이 올라가야 합니다. 무작정 쉬면 국제 경쟁력 낮아집니다. 그러면 일자리가 줄어요."

아울러 이 회장은 정년 연장 문제에 대해서도 "이 역시 생산성에 비례한 연장이어야 한다"며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 회장은 산자부 장관과 무협회장을 지내면서 수출 확대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요즘은 내수 체력 보강이 수출 못지 않게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부분에서 박 당선인에게 빌려줄 지혜가 있는지 물었더니 "오해를 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대외 의존도가 높다 보니 외국 경제가 다운되면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동력을 내수에서도 찾자는 건데요. 오해하기 쉬운 것은 수출을 포기하고 내수를 하자는 논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수출은 수출대로 하면서 내수를 키워야죠. 내수와 수출을 트레이드-오프(한쪽이 늘면 한쪽이 줄어드는) 관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미진한 부분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정부의 정치의 몫입니다. 박 당선인에게도 이 부분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이희범 회장, 역발상의 지혜 강조



해운사 가장 많은 나라는 내륙 스위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강국 만들었죠


"세계에서 해운업체가 가장 많은 나라가 어딘지 아십니까."

이희범 경총 회장은 인터뷰 중 던진 이 질문에 취재진이 정답을 내놓지 못하자 "바다와 전혀 접해 있지 않은 스위스가 세계 최대 해운국가입니다. 바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니 자연 기업들이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법인세가 낮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에 세계의 해운사가 스위스에 몰려든 것"이라며 "역발상의 지혜를 거듭 강조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과감한 역발상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게 이 회장의 생각이다.

이어 이 회장은 "정치권이 법인세율을 낮춰야 하냐, 올려야 하냐의 논쟁을 하느라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한국을 아시아의 기업 천국으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왜 글로벌 기업들이 아시아 헤드쿼터를 홍콩과 싱가포르에 세우고 한국에는 잘 오지 않는가를 알아야 한다"면서 "일자리 문제 해결의 근본 또한 이 같은 맥락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상생'이라는 용어도 자신이 산자부 장관이던 시절 가장 먼저 썼고 관련 법도 그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제는 대기업 혼자 잘 살자고 생각하는 오너 경영인은 없다"면서 "해외에서 경쟁하려면 협력사와의 긴밀한 협조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므로 대중소기업 상생 문제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회장은 인터뷰 중 휴일 확대 문제에 대해 얘기하다 여담이라며 "직장에서 성공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외부 강연을 할 때 늘 하는 얘기인데 5분 일찍 출근하고 5분 늦게 퇴근하는 것을 10년만 해보라고 권한다"고 소개했다. 남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성공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저 스스로도 공직 시절 차관이 되기 전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쉬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고 장관이 되니까 다시 휴일에 나와 일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그가 얘기한 성공비결은 비단 직장인뿐만 아니라 국가지도자에게도 해당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약력

▦1949년 경북 안동 ▦1971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72년 행정고시 12회(수석합격) ▦1981년 대통령실 비서관 ▦1987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MBA(수석졸업) ▦1994년 EU한국대표부 상무관 ▦2001년 산업자원부 차관 ▦2002년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2003년 경희대 경영학박사 ▦2003년 서울산업대 총장 ▦2003년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 ▦2006년 제26대 한국무역협회장 ▦2010년 STX중공업 회장 ▦2010년 한국경영자총협회장 ▦2011년 SXT중공업ㆍ건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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