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김치 한포기에 사랑을…

김장철이다. 어머니를 도와 찬바람을 맞아가며 소금에 절인 배추와 무를 건져내던 일도 오랜 추억이 돼버렸다. 핵가족 사회가 되면서 김장을 담그기보다 사서 먹는 편이 더 경제적이고 편리한 시절이다. 더욱이 젊은 부부가 겨울의 문턱에서 김장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올해는 여느 때와 달리 김장 바람이 불고 있다.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발견되고 국산 김치에서도 소량이나마 미생물이 발견됐다고 해서 그런다고 한다. 아파트촌에서도 김장을 돌리는 미풍양속이 눈에 띄고 신혼부부도 휴일날 처가댁에 가서 김장 일을 도운 공로(?)로 김치를 얻어오는 일도 주변에서 본다. 그런데 또 다른 곳에서 느닷없이 김장 담그기 바람이 부는 곳이 있다. 요즘 사회 저명 인사들이 머리에 비닐 위생모를 쓰고 아주머니와 함께 김장을 담그며 너털웃음을 웃는 모습을 언론매체를 통해 자주 본다. 기업인과 은행장, 유명 운동선수, 정치인마저 김장 담그기 운동에 참여해 사진에 찍혀 나온다. 그것도 앞에 꼭 ‘사랑의’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던 사람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사회봉사활동에 나섰는지 궁금하지만 모양새는 좋다. 올 연말에 ‘사랑의 김장 담그기’ 행사 열풍이 부는 것은 김치파동 후유증만은 아닌 것 같다. 재벌 그룹의 사회공헌활동이 이슈로 떠오르고 몇 차례 금융위기의 중심에 있었던 은행들이 10조원 이상의 수익을 내면서 공공성이 강조되는 작금의 사회적 분위기가 이런 쇼를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다. 가진 사람들이 힘없고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는 훈훈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종교인들만의 일이 아니다. 가진 사람이 불우한 이웃에게 부와 고통을 나누는 일은 한국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기부문화가 기업인들의 주요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는 “가족에게 필요한 재산을 빼고 개인의 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유언을 남겼고 그의 철학은 1세기가 넘도록 미국 부유층에 이어져오고 있다. 지난 90년대 미국 경제가 10년간 장기호황을 구가할 때 부유층의 연간 기부금은 1,000억달러에서 1,500억달러로 급증했고, 2001~2003년 불황기에도 기부금 액수는 줄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인텔의 창업자 고든 무어, 금융계 황제로 불리는 워런 버핏, CNN의 창업자 테드 터너는 수십억 또는 수백억 달러의 금액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들이 기부한 돈은 교육, 건강, 의학, 예술, 환경보호, 종교, 아프리카 기아 및 에이즈 퇴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쓰여지고 있다. 2000년 이후 한국 경제는 구조적인 저성장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계층간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추세다. 글로벌 사업영역을 구축한 대기업은 높은 수익을 내는 데 비해 내수에 의존하는 중소기업은 경영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있는 사람은 부동산과 각종 재테크에서 많은 돈을 버는 데 비해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 어려운 사람들의 층이 두터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참여정부의 분배 정책을 비난하는 식자들도 가진 자들의 사회공헌활동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시에 많이 가지지 못한 사람이 사회적 부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자본주의를 성숙시키는 길이 아닐까. 우리 속담에 ‘광에서 인심난다’고 했다. 자본주의 역사가 일천하고 가진 재산이 선진국보다 못하다고 해도 조금씩 나누는 선조들의 미풍양속은 우리 전통문화 속에 깊이 숨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명 인사들의 김장 담그기 행사가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고 사회 지도층들이 불우한 이웃에게 따듯한 정을 전하는 사회적 운동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 연말이 다가온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웠던 한해를 보내면서 들뜨고 흥청거릴 것이 아니라 조용히 이웃을 들여다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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