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주희 기자의 About Stage] 역할 커지는 뮤지컬 번역… 말·리듬·감성을 요리하다

뮤지컬 '킹키부츠' 번역 담당자의 작업 노트. 원작에서 '버건디'로 표현된 단어에 적합한 한국어를 고르기 위해 육포, 돈가스 소스 등 다양한 단어를 나열하며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사진=김수빈 킹키부츠 번역작가 제공

"오, 돈 돈 돼지 돈씨."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여장남자 롤라는 자신을 혐오하는 남자 '돈'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미국 원작의 대사는 'Tell me, Dapper Don.' 직역하면 '이거 봐 말쑥한 돈씨' 정도랄까. 'D'로 시작하는 형용사로 말장난을 친 원작의 대사는 번역을 거쳐 리듬 있는 언어유희로 바뀌었다.

외국산 뮤지컬이 늘어나며 원작의 감성을 지키면서 한국인의 정서도 담아야 하는 번역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뮤지컬 번역은 크게 두 가지다. 외국어 공연에 제공될 자막 번역과 '윤색'이라고도 표현하는, 외국 작품의 한국어 공연을 위한 번역이다. 전자가 읽기에 무게를 둔다면 후자는 듣기에 방점을 찍고 멜로디와 음절, 배우의 발음까지 고려해야 한다. 같은 작품이라도 자막용이냐 공연용이냐에 따라 번역 대사의 분위기와 호흡이 미묘하게 다르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표 넘버 '대성당들의 시대'는 한국어 공연에서 '아름다운 도시 파리/전능한 신의 시대/때는 1482년/욕망과 사랑의 이야기'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반면 최근 개막한 오리지널 내한공연 자막에선 같은 부분이 '이 이야기는 1482년, 신의 권력이 절대적이던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서 생긴 사랑과 욕망의 노래'로 나온다. 두 공연 모두 작사가 박창학씨가 번역했다.

번역을 위해선 '역 번역'이 필수다.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한국어 대본을 다시 원작자의 언어로 바꿔 확인 및 허락을 구해야 한다. 나라마다 문화나 유머코드가 다르기에 역 번역을 통해 대사의 맥락과 상황을 설명·설득하는 작업이 뒤따른다. 역 번역 대본의 절반 이상을 주석이 차지하는 이유다. 은유적 표현이 많은 뮤지컬 '원스'는 직역할 경우 말이 되지 않는 표현이 상당해 윤색 작업에만 반년 이상이 걸렸다는 후문이다.

연습기간 배우들의 제안으로 수정이 이뤄지기도 한다. 킹키부츠에서 롤라가 과한 작업 의상을 지적받은 뒤 하는 'Don't be so hard on yourself(너무 빡빡하게 굴지마)' 라는 대사는 국내 공연에서 '내 복장이 네 복장 터지게 하니'로 바뀌었는데, 이는 출연배우 오만석의 아이디어다.

뮤지컬 번역 전문가(번역작가)도 있지만, 최근엔 번역 능력을 갖춘 연출·작가가 윤색을 담당하기도 한다. 킹키부츠는 맨오브라만차 지킬앤하이드 연출로 참여했던 김수빈 작가가, 원스는 연극 '푸르른 날에'로 유명한 고선웅 연출이 번역을 맡았다.

말과 리듬, 감성을 요리하며 관객의 입맛을 돋우는 작업을 이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윤색은 언어를 고운 체로 거르는 과정이다.(고선웅)", "카멜레온이다. 같은 말도 여러 색의 옷을 입을 수 있다.(김수빈)" 역시 말의 달인들답다. ssong@sed.co.kr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