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후 한국은행은 기구 자체를 통째로 바꾸는 변화를 겪었다. 한은에 '힘'을 부여했던 은행감독권을 떼내는 대신 정부로부터 금융통화위원회 의장 자리를 넘겨 받은 것이다. 그만큼 한은 직원들은 '독립성'을 소중하게 여겼다. 한은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남대문사(寺)'라고 비아냥거렸지만 BOK(한은)맨들은 '고립=독립'이라는 말을 향유(?)했다. 그리고 시장은 금리결정에 대해 걸핏하면 간섭하는 정부 당국자들 대신 '외로운 한은'을 두둔했다.
지난해까지 몇년 동안 잃어버린 힘을 찾기 위해 금융감독원과의 금융회사 공동 검사권을 달라고 외치면서 금융감독원이나 금융위원회 등과 힘겨루기를 할 때도 여론의 저울추는 한은에 향했다.
하지만 그런 시장조차 지금 한은에 등을 돌리고 있다. 경제부총리와 여당 원내대표도 모자라 청와대 경제수석까지 노골적으로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나섰다. 한은의 독립성이 이렇듯 벼랑 끝에 내몰렸지만 약자인 한은의 우군은 별로 없는 듯하다.
이제 시장에는 11일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내릴 것으로 확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김중수 총재가 최근 수차례 국제적인 흐름을 얘기하면서 금리동결의 당위성을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자취를 감췄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민간경제연구소장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김 총재는 더 이상 시장에서 영향력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한은의 이 같은 상황이 우리 경제사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한 경제부처 전직 장관은 "입법ㆍ사법ㆍ행정이 '3권 분립'을 이루듯 한은은 경제체제에서 기획재정부나 청와대ㆍ금융위원회 등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며 "그런데 지금은 그 같은 경제권력의 추가 완전히 깨진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경제체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취임 초 "한은도 정부"라며 정책공조를 선언한 김 총재의 일성은 이렇게 우리 경제체제 전반에 치명상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