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영웅전 제4보호적수가 없었던 기사
김봉선에 이어 김명환, 신호열, 장국원, 민영현이 각각 선으로 조남철과 10번기를 벌였으나 장국원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은 모두 「선둘」로 치수가 고쳐졌다. 장국원은 제2차 10번기에 도전했다가 결국 치수가 변경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신문사에서는 조남철을 빼고 김명환과 김봉선의 10번기, 김봉선과 조상연의 10번기를 속개하여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했으나 큰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1948년부터 1965년까지 17년은 조남철의 1인독주시대였다. 아무도 조남철의 아성을 흔들지 못했다. 조남철에게는 호적수가 없었으므로 언제나 혼자 각광을 받고 혼자 우승상금을 독식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그의 불행이었다.
만약 그에게 좋은 맞수가 있었더라면 그의 바둑은 한층 더 진보했을 것이며 팬들의 인기도 더욱 가열되었을 것이다.
1950년대말까지만 해도 모든 국내 기사들의 수준은 조남철에게 선이나 그 이하였다. 그가 호선의 상대를 맞이한 것은 1960년대 중반 김인의 바둑이 숙성한 이후였는데 그때는 이미 조남철의 나이 43세였고 조남철은 호선의 상대를 만나자마자 무너져 버렸다.
그때까지는 모든 기사들이 조남철의 이름 석 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지냈다. 오직 한 사람 예외가 있었으니 그는 김명환4단이었다. 김명환만은 언제나 기가 꺾이지 않고 호언장담이었다.
『잔꾀에 넘어가서 이번에는 졌지만 진짜로 당당하게 맞부딪친다면 팽팽한 승부일 거야.』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그는 조남철과 100국 이상의 공식 대국을 가졌다. 조남철에 대한 승률은 1할도 채 못되었으나 그래도 그는 이따금 판맛을 보는 유일한 기사였다. (73…이음)
노승일·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0/07/3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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