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스리랑카 26년 내전 끝났지만…

차별·억압등'민족 충돌' 불씨는 여전
1980년대 이미 평등보장법 제정 불구
스리랑카 정부 타밀족 차별정책 유지
내전기간 학살등 진상조사도 과제로


‘과대망상 테러리스트 프라바카란 사살.’ 지난 19일 수도 콜롬보에서 한 시민이 타밀반군 지도자였던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을 펼쳐 들고 있다. 콜롬보=AFP연합뉴스

18일 스리랑카 정부는 26년에 걸친 내전이 종료됐다고 공식 선포했다. 다음날인 19일, 영국 인디펜던트는 한 테러리스트의 부고를 띄웠다. 바로 스리랑카 정부에 맞서 타밀족 해방운동을 이끌어온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54). 인디펜던트 지의 부고기사대로 그는 '누군가에게는 테러리스트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자유의 투사'라는 말에 딱 맞는 인물이다.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정의하기는 힘들단 이야기다. ◇ 프라바카란, 자유의 투사 혹은 테러리스트= 그의 삶에는 26년에 걸친 스리랑카 내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프라바카란은 1954년 스리랑카 북부 벨베티투라이에서 타밀족으로 태어났다. 정부기관의 농업경제학자인 아버지를 둬 넉넉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타밀족과 싱할리족 사이의 갈등을 지켜보며 극단적인 타밀독립주의자로 자라났다. 결국 십대에 무장투쟁 전선에 뛰어든 그는 고작 18세에 타밀족 군소 무장단체를 통합한 '타밀 뉴 타이거(TNT)'를 결성, 리더의 자리에 올랐다. TNT는 곧 타밀엘람 해방호랑이(LTTE)로 이름을 바꾸고 세를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프리바카란은 1975년 거의 단독으로 알프레드 부라야파 전 자프나 주지사를 암살했다. LTTE가 몸집을 불려나가는 사이 타밀족들은 프라바카란을 '탬비(작은 동생)'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타밀족들은 LTTE 이끌고 스리랑카에 대항할 인물은 프라바카란 뿐이라고 믿었고, 그를 신처럼 떠받들기까지 했다. LTTE가 게릴라전술을 통해 정부군과 전면전을 시작한 것은 1983년. 이 때를 기점으로 아시아 최장기의 스리랑카 내전이 펼쳐졌다. LTTE는 1991년 라지브 간디 전 인도 총리를 암살했으며, 1996년 스리랑카 중앙은행(CBS) 폭파사건을 일으켜 90여명을 죽게 했다. 내전이 이어지면서 미국과 캐나다, 호주, 영국 등은 LTTE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했다. LTTE가 타밀족 독립을 외치며 저항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프라바카란은 최근 아랍 지역에서 자행되고 있는 자살폭탄테러를 처음으로 고안해냈다. 주로 광신적인 타밀족 여성들이 LTTE의 자살공격부대인 '블랙타이거'에 입회, 자살폭탄테러 임무를 수행했다. 프라바카란은 테러 배후조종 혐의로 인터폴의 적색 수배자 명단에 올랐고 궐석재판에서 20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여기에 수많은 테러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LTTE는 자신들의 투쟁에 유소년들도 가담시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내부의 온건파들을 철저히 숙청한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정부와의 타협을 선택지에서 아예 배제시켜 극단으로 치닫기도 했다. ◇내전 책임의 절반은 스리랑카 정부= 타밀족에 대한 차별 정책을 고집스럽게 유지한 스리랑카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각도 곱지 않다. 싱할리족이 장악한 스리랑카 정부가 타밀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고수하면서 내전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이유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싱할리족은 재빨리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1956년에는 싱할리 어를 스리랑카의 표준으로 지정해 타밀족들의 분노를 샀다. 이후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족에 대한 억압정책을 시행해왔다. 타밀족은 여전히 교육이나 취업 등에 제한받고 있으며, 특히 타밀족이 공직에 몸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일례로 스리랑카 경찰의 대부분은 싱할리족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고학력 타밀족은 해방 이후 대거 외국으로 이주했다. 스리랑카 정부는 1983년 LTTE의 공격으로 정부군 13명이 사망한 후 전국적으로 벌어진 싱할리족의 타밀족 학살을 방관하기도 했다. 스리랑카 인구의 약 12%(240만명)를 차지하는 타밀족은 힌두교를 주로 믿으며, 다수민족인 싱할리족에 비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비율이 월등히 높고 가난한 편이다. 싱할리족은 불교 신자의 비율이 높지만, 종교가 민족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 부각된 적은 없다. ◇ 내전은 끝났지만…여전히 불씨 남아= LTTE가 프라바카란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이는 많지 않다. 프라바카란의 전기를 집필해 온 인도 언론인 나라얀 스와미는 "LTTE에는 하나의 리더, 하나의 신만이 존재했다"며 "이제 LTTE는 조직을 존속시키거나 다시 무장투쟁에 나설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타밀족에 대한 싱할리족의 차별과 억압이 계속되는 한 언제든지 다시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스리랑카 정부는 1980년대에 타밀족과 싱할리족의 평등을 보장하는 법을 제정했지만, 아직도 실효성이 적다는 지적이다. 기나긴 내전의 후유증도 만만찮다. 이미 타밀족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다. 영국의 인권운동가인 패러 밀러는 "타밀족 어린이들은 전투기와 폭탄밖에 그릴 줄 모르고, 남편을 잃은 타밀족 여성들이 부지기수"라고 전했다. 또 타밀족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민족 간 대학살의 기록이 남게 됐다. 26년간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는 7만 여명. 지난 4개월간만 해도 내전 때문에 죽은 사람 수가 6,500명에 이른다. 내전 기간의 잔혹행위에 대한 진상조사도 과제로 남아있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외무장관들은 지난 18일 브뤼셀에서 열린 정례 일반ㆍ대외관계이사회(외무장관회의)에서 정부군과 반군 양측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전범행위를 저질렀는지 여부를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외무장관들은 성명을 통해 "EU는 독립적인 조사를 통해 인도주의와 인권 관련한 국제법을 위반한 혐의가 규명돼야 함을 강조한다"며 "책임자들은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라고 밝혔다. 스리랑카 정부는 내전 막바지에도 수십만명의 민간인이 갇혀 있던 반군지역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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