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위스 대학들은 파격적인 지원과 깐깐한 학사관리로 최고 수준의 인재를 길러내고 있다. 수백만 권의 장서를 갖춘 취리히대학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책과 씨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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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탤런트'를 춤추게 하라] 스위스
연방정부도 200개大중 工大2곳 최우선지원유럽 공통학점제에 석사이상 과정 영어 강의대학 입학시험 없지만 졸업생은 절반에 그쳐
스위스 대학들은 파격적인 지원과 깐깐한 학사관리로 최고 수준의 인재를 길러내고 있다. 수백만 권의 장서를 갖춘 취리히대학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책과 씨름하고 있다.
“(스위스의) 대학은 (스위스의) 현재가 아닌 미래다.”
지난 4일 서울경제 취재진이 찾은 로잔연방공과대학(EPFL). 한창 공사 중인 건물부터 눈에 들어왔다. 반도체ㆍ신소재 등에 20년 간 집중해왔던 EPFL이 새로운 미래를 위해 바이오센터를 건설하고 있는 것. 재정지원은 연방정부와 노바티스 등 스위스의 유명 제약사가 담당한다.
얀 안데르손 만손 EPFL 부총장은 “스위스 대학은 인재를 발굴하고 성장시켜 스위스는 물론 전세계의 부를 창출하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최우선 순위로 이공계를 선택하다=23개의 칸톤(州)으로 나뉜 스위스에 연방대학은 단 두 개뿐이다. ETHZ와 EPFL. 두 대학 모두 공대이다. 칸톤마다 10개의 대학이 있고 호텔경영학 등에 특화된 사립학교가 있지만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학은 ETHZ와 EPFL뿐이다.
아인슈타인을 꿈 꾼다면 스위스로 가라는 말처럼 스위스는 이공계의 천국이다. 스위스연방 통계청에 따르면 80~2005년 스위스에서 자연과학 분야 학생 수는 220%나 증가했지만 칸톤 대학은 33%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공계 스위스의 원동력은 구조화된 산학연계 프로그램이다. ETHZ의 경우에도 매년 10~20개의 랩(연구실)이 기업들이 출자한 유로펀드를 이용해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까지 만들어낸다. ETHZ는 84개 특허와 225개의 공동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2억스위스프랑 상당의 제약기술을 개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EPFL의 대표적인 작품은 알링기 요트. 신소재를 이용한 이 요트는 아메리카컵 요트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산악국가 스위스를 세계 최고의 선박소재기술 국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컴퓨터 마우스를 상업화한 로지테크도 EPFL 졸업생들이 창업한 회사. 지금도 EPFL과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대학도 글로벌 경쟁력이 필요하다=스위스 대학의 글로벌화에는 99년 ‘볼로나 개혁’이 기반이 됐다.
칸톤마다 학기가 시작하는 달이 다를 정도로 제각각이던 교육제도를 정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럽 전체의 교육체계를 표준화해 미국으로 발길을 돌리던 글로벌 인재들을 스위스로 끌어들였다.
대표적인 성과가 2005년 도입된 ECTS(European Credit Transfer System). 유럽 전체에 공통된 학점제를 도입해 객관적인 평가기준을 마련했다. 또 개혁 전에는 학사학위가 없는 대학이 많았으나 지금은 많은 대학이 학사ㆍ석사ㆍ박사학위 과정을 갖췄다.
제도개혁과 함께 외국인이 가장 어려워하던 언어의 장벽도 걷어냈다.
독일어ㆍ프랑스어ㆍ이탈리아어ㆍ로망슈어 등 공용어가 네 가지인 스위스에서도 석사과정 이상의 강의는 영어로 진행된다. 크리스티나 샴그롱 EPFL 혁신센터 연구원은 “영어권 외국인 학생이 미국보다 더 편안하게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며 “2010년 이후에는 외국인이 스위스 석사 이상 과정의 절반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EPFL 산업공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신정호씨는 “스위스 대학은 글로벌화를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며 “스위스 정부는 2015년께 볼로냐시스템이 적용되는 학생 수가 20만명에 이를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살벌한 경쟁, 냉정한 선택=캐나다에서 올 초 ETHZ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마이크 케넬씨(20)는 요즘 바짝 긴장하고 있다. 1차 수학시험에서 낙제한 만큼 한번 더 낙제하면 공과대학인 ETHZ에서 짐을 싸야 하기 때문이다.
인재를 끝없이 지원하는 스위스 대학교육은 그만큼 인재 평가에 냉정하다. 고등교육이 권리인 만큼 연방대학을 제외한 칸톤 대학은 입학시험이 없는 대신 졸업이 하늘의 별 따기다. 아베니르 스위스연구소에 따르면 신입생의 75%가 낙제를 하며 학사학위를 취득하는 졸업생은 입학생의 50%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낙제생은 어디로 가나.
2학년 진학에 실패한 신입생 중 상당수가 학사학위를 요구하지 않는 일자리를 찾는다. 이미 16세에 했던 선택을 다시 해야 하는 셈이다.
스위스 대학을 알려면 스위스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우선 필요하다. 초등교육부터 프라이머리와 세컨더리 교육으로 나뉜 학교는 철저하게 진학과 직업교육을 구분한다. 물론 세컨더리 학교 출신도 직업교육을 받은 후 필요하다면 칸톤 대학에 진학할 수는 있다.
대학 진학 후에는 ECTS에 따른 학점을 따야 학사ㆍ석사ㆍ박사 등의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김상묵 KOTRA 취리히무역관장은 “연구와 직업을 철저히 분리해 대학을 특성화시킨 것이 스위스 대학의 특징”이라며 “UBS 회장이 세컨더리 학교 출신일 정도로 직업교육에도 성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원도 없이 강대국에 둘러싸인 스위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인재양성을 선택했다. ETHZ와 EPFL로 대표되는 스위스 대학은 국가 미래를 위해 이 시간에도 세계의 인재사관학교로 거듭나려 안간힘을 쏟고 있다.
● 얀 안데르손 만손 로잔연방공과대학 부총장
"연구에 배고픈 사람들만 교수·학생으로 선발하죠"
"(교수든 학생이든) 오직 연구에 배고픈 사람들만 뽑습니다."
얀 안데르손 만손(사진)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EPFL) 부총장은 글로벌 경쟁력의 원천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연구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말했다. 만손 부총장은 "우리는 연구에 갈증을 느끼는 인재들을 아낌없이 지원한다"며 "뛰어난 학자들을 교수로 초빙하는 것도 전략적으로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 수십명의 석학을 자랑하는 EPFL은 최근 폴 앨런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의 영입을 추진하는 등 글로벌 인재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그는 EPFL의 강점에 대해 "EPFL은 전체 학생 중 40%가 외국인으로 구성된 국제화된 대학"이라며 "스위스의 교육투자지수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 것이야말로 EPFL이 세계적인 공과대학이 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높은 교육투자지수 때문에 기업과 연계된 대학 연구가 부로 창출돼 다시 대학 재정을 강화한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EPFL과 미국 대학과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만손 부총장은 "교수들 간은 물론 랩(개별 연구소) 간에도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협력센터를 만든 것이 특징"이라며 "하나의 연구과제를 한 연구소에 고정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상호 교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만손 부총장은 또 "EPFL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성적으로 경쟁시키는 적이 있지만 이에 앞서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다"며 "스위스 대학은 미국과 달리 연구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연구를 진행하고 기업과 연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그는 해외 석학을 교수로 초빙하느라 대학이 너무 늙어버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25세의 젊은 교수도 적지않다면서 "미래의 슈퍼스타와 오늘의 슈퍼스타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데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스웨덴 출신인 만손 부총장은 평소 '미스터 코리아'로 불릴 정도로 대표적인 지한파 교수로 통한다. 다른 대학과 달리 한국을 EPFL의 아시아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부인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얼마 전 로잔에서 열린 '한ㆍ스위스 과학ㆍ기술 포럼'에 참석하기도 한 그는 한국 교육 시스템에 대해 "학생들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시스템이 너무 위계적"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한국의 대학 시스템은 빨리빨리 문화 때문에 과도하게 다이내믹한 듯하다"며 "연구와 교육은 마음을 열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특별취재팀: 오철수차장(팀장)·문성진(베이징특파원)·이규진·서정명(뉴욕특파원)·김현수·김호정·김민형·김상용기자 csoh@sed.co.kr
입력시간 : 2007/07/17 1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