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 12월 26일] 난징반(反) 흑인시위 권홍우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1988년 12월26일 저녁, 중국 난징(南京)역. 3,000여명의 시위대가 역을 에워쌌다. 난징을 탈출하려는 흑인들을 잡기 위해서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공안이 출동해 시위대를 뜯어말렸지만 3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건이 최초로 불거진 시기는 성탄 전야. 흑인유학생을 따라 헤하이(河海)대로 들어서는 중국 여성들에게 경비원이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하면서 비롯됐다. 말싸움은 중국인과 흑인 간 집단충돌로 번져 13명이 다쳤다. 이튿날 오후부터는 '싸움을 말리던 중국인 교수가 흑인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헛소문이 돌며 반 흑인 감정을 더욱 증폭시켰다. '흑색 악마를 죽이자'는 구호가 등장해도 방관하던 공안을 움직인 것은 시위대의 개혁 요구. '외국인에 대한 특혜 중단'에 이어 '개혁'과 '인권존중'을 요구하는 구호가 나오자 공안이 대거 투입돼 소요를 가라앉혔다. 반 흑인 시위는 상하이와 베이징에 번져 이듬해 초까지 이어졌다. 1989년 4월 발생한 톈안먼 사태도 반 흑인 시위가 자연스럽게 연장된 결과라는 시각도 있다. '감히 중국 여성과 교제하는 흑인'을 응징했던 외국인 혐오증은 과거지사일까. 겉으로는 그렇다. 21년 전 6,000여명이었던 중국 정부의 장학금을 받는 2만2,000여명을 포함해 3만여명으로 늘어났다. 너그러워져서가 아니라 천연자원 확보 기지로 아프리카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민족주의 성향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경제규모가 난징 소요 당시보다 20배 이상 커진 오늘날 중국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른다. 2008년에는 중국인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경찰의 눈앞에서 한국인들을 집단 구타한 적도 있다. 고구려 역사를 송두리째 삼키려는 동북공정도 같은 맥락이다. 중화패권주의의 앞날이 두렵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