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5/아일랜드 디자인연(한국기업의 21세기 비전)

◎“멋의 고급화” 깃발 유럽 안방 파고들기/벽걸이 오디오 등 23개 새모델 호평… 한국겨냥 신형 다리미 박차도유럽의 변방 아일랜드. 유럽의 북서쪽 끄트머리 영국의 서쪽에 다소곳이 웅크리고 있는, 바닷가를 벗어나 한시간이상 달릴 수 없는 작은 섬나라. 유럽 어느 나라와도 다른 독특한 풍토를 지녔다는 아일랜드에 가기 위해서는 영국 런던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만 했다. 난해하기만 한 제임스 조이스의 모국이며 95년 노벨문학상을 탄 시인 세이머스 헤이니를 비롯해 윌리엄 버틀러(23년), 희곡작가 샤무엘 베케트(69년)등 3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아일랜드. 그러나 영화 「파 앤 어웨이」에서 감자 썩는 병으로 인한 굶주림에 못견뎌 아일랜드에서 신대륙 미국으로 이민간 주인공 톰 크루즈는 앵글로 색슨들로부터 「더러운 아이리시(아일랜드인)」라는 수모를 당했다. 세기적 문학가의 모국이면서도 한때 다른 유럽인들로부터 배척당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던 나라. 케네디 전 대통령부터 클린턴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여러번 백악관을 차지한 아이리시이지만 막상 아일랜드는 아직도 넉넉하지 못한 인구 3백50만의 소국이다. LG전자는 지난 91년 이곳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디자인연구센터를 설립했다. 흑맥주 기네스, 아이리시 위스키정도외에는 우리에게 낯선 아일랜드를 투자지역으로, 그것도 디자인연구센터 설립지로 선택한 것은 의외라는 느낌였다. 감각적인 디자인이라면 이탈리아나 프랑스, 기능적인 디자인이라면 유럽 제조업의 중심지 독일정도가 떠오르지만 아일랜드와 디자인은 잘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디자인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인 매트 라이언(33)의 설명은 의외로 간명했다. 유럽시장과의 거리가 오히려 고객들의 다양한 취향을 보다 뚜렷하게 찾아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매트 라이언은 런던의 디자인회사에서 일하다가 영국 왕립디자인대학원을 졸업하고 91년 6월 설립때부터 줄곧 디자인연구센터에 몸담아 왔다. 그는 아일랜드가 유럽의 변방이기 때문에 범유럽적인 디자인을 하기에 적합한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유럽시장의 경우 독일을 비롯한 북쪽 지역과 이탈리아·스페인 등 남쪽지역, 프랑스, 영국 등이 선호하는 디자인이 서로 다른만큼 이중 한 지역에 자리잡을 경우 해당지역의 풍조에 젖기 쉽지만 아일랜드에서는 지역별 특성을 모두 감안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심재진 법인장도 『특색이 없는게 아일랜드의 특징이다. 일하다 보니 특색없는 곳에서 만드는게 특색있는 곳에서 만드는 것보다 나은 것 같다. 영국이나 독일에서 디자인하면 아무리 잘 만들어도 현지감각일뿐 범유럽형이 나오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더블린에서는 영국도, 독일도, 프랑스도, 이탈리아도 아닌 전체 유럽의 특징을 알아내고 이해하면서 보다 넓은 유럽시장을 커버할 수 있는 디자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일랜드가 외져보이지만 유럽 본토와 사고의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연구원들이 툭하면 유럽 본토는 물론 미국등지까지 쉴새없이 여행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참신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심법인장의 자랑이다. 더블린 남부지역 폭스록의 비즈니스 파크에 자리잡은 LG전자 디자인연구센터는 깔끔하고 아담한 3층 건물. 맞은 편에는 네덜란드에서 옮겨오는 마이크로소프트사 유럽본부의 건물공사가 한창이었다. 휼렛팩커드사의 연구센터도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더블린이 소프트웨어 등의 연구 최적지로 떠오르면서 유명 회사들의 연구센터가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다. LG전자 디자인연구센터의 직원은 10명. 심법인장외에는 모두 현지채용 직원이며 경리담당과 안내겸 관리를 담당하는 여직원을 뺀 7명이 연구원이다. 이들 7명의 연구원이 올해 만들어낸 디자인은 모두 23개. 전자레인지 4개모델, TV와 TVCR(TV와 VCR을 일체형으로 합친 것) 각 3개를 비롯해 유럽용 진공청소기, 한국용 다리미와 와이드스크린등이다. 최근 LG전자가 휴대폰에 팩시밀리, 무선호출기등 다양한 기능을 한데 묶어 의욕적으로 내놓은 PDA의 후속모델도 이곳 더블린에서 디자인했다. 디자인연구센터의 히트 디자인은 현재 유럽에서 호평받고 있는 TV의 아미라, 아쿠아와 전자레인지의 웨이브시리즈. 뉴캐슬 LG전자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아미라는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등 남부유럽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구 소련지역에서는 한달에 1만5천대씩 팔려나가는 효자이다. 현재 아미라Ⅱ까지 개발되었고 아미라Ⅲ도 개발완료단계이다. 아쿠아는 독일, 스웨덴 등 북유럽지역을 파고들고 있다. 더블린 디자인연구센터의 성가를 한껏 드높였던 작품은 지난 94년초 개발돼 95년에 제품화된 벽걸이 오디오. 95년 6월 우수산업디자인 상품선정제에서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같은해 9월 독일 베를린 전자쇼에 특별 갤러리로 출품돼 쇼기간중에만 무려 5천3백여명의 딜러들이 사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구로공장에서 생산되는 이 벽걸이 오디오는 「피니트」란 이름으로 독일, 스웨덴등에서 팔리고 있다. 하지만 디자인에서 성공한 벽걸이 오디오는 상품으로서는 결국 실패했다. 독일, 스웨덴을 제외한 나머지 유럽시장에서는 라운드형이 강세를 보여 장방형인 피니트가 제자리를 잡지 못했다. 또 무엇보다도 기대했던 한국시장에서 벽걸이 오디오 붐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오디오업체에서도 LG 벽걸이 오디오의 성공여부를 주목하면서 자체 모델개발에 나섰지만 일과성으로 시들어버렸다. 그 결과 규모의 생산이 이뤄지지 않았고 지난 3월 더블린 디자인연구센터에서 보낸 후속모델은 사장되어버렸다. 벽걸이 오디오의 실패는 그러나 더블린 디자인연구센터에 값진 교훈을 안겨주었다. 산업디자인은 「반걸음」만 앞서가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시킨 것이다. 특히 시장지배적 브랜드가 아닐 경우 너무 앞서나가는 디자인은 위험부담이 크다는게 심법인장의 분석이다. 또 새로운 개념의 디자인을 선보일때는 초점을 명확히 한 홍보전략이 구사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현재 유럽시장에서 골드스타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는 LG전자는 오는 98년부터 LG로 전자, 전기제품의 브랜드를 바꿀 예정이다. 디자인연구센터는 여기에 맞춰 LG의 디자인을 고급제품 이미지로 부각시킬 계획이다. 「산업디자인은 제품의 경쟁력및 회사의 이미지와 직결된다(구자홍 사장)」는 모토대로 LG전자는 현재 1백80명(서울디자인연구소 1백70명, 더블린 10명)인 연구인력을 2001년에 2백50명까지 늘리되 해외 연구인력 확충에 역점을 둔다는 방침이다. 더블린 디자인연구센터는 이같은 방침에 따라 연말부터 일을 시작할 2명의 연구원을 이미 선발했다. 또 내년에 4명의 연구원을 추가로 선발할 계획이다. 현재 연구센터의 연구원 7명중 6명은 아일랜드인이고 나머지 한명은 현지에서 채용한 한국인 문보경씨(여)다. 문씨는 미국 인디애나주의 퍼듀대학에서 산업디자인 석사학위를 받은후 뉴저지의 LG전자 디자인연구센터 분소에서 잠시 일하다 지난 6월 더블린에 왔다. 문씨는 현재 한국시장을 겨냥한 유럽형 다리미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으며 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는 전기제품 디자인을 맡고 있다. 새로 뽑힌 2명의 연구원은 독일인과 프랑스인. 심법인장은 『지금까지는 정착을 위해 아일랜드인을 대부분 채용했지만 유럽시장 전체용 디자인을 위해서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고의 세계화(글로벌화), 행동의 현지화(로컬화)」를 기치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LG전자의 야심이 유럽 동쪽 끝 더블린에서 무르익고 있었다.<더블린=이세정> ◎인터뷰/심재진 더블린 디자인연 법인장/“디자인에 맞춰 기술개발되는 시대/멀티미디어연·SW센터 건립 계획” 지난해 1월부터 LG전자 더블린 디자인연구센터의 운영책임을 떠맡은 심재진법인장은 지난 78년 LG전자 디자인연구소에 입사한이후 줄곧 산업디자이너로 일해왔다. 더블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1년에 최소한 한 모델이상은 디자인해왔다는 심법인장은 『과거에는 기술이 앞서고 디자인이 뒤따라갔지만 이제는 디자인에 맞춰 기술이 개발되는 시대』라고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해외에 디자인연구소를 단독 설립한다는게 생소한데.(더블린 연구소는 LG전자가 자본금 1백50만달러, 약 13억원을 전액 출자해 설립한 현지법인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전자회사들도 해외에 전자디자인연구소를 세운 적은 없다. 대부분 현지 연구소에 용역을 주고 정보를 수집하는 사무소를 만드는 정도이다. 그런데도 LG전자가 해외 연구소를 만든 것은 해외시장 공략을 위한 현지화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절박한 심정에서 내려진 결정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겁없는 한국인 기질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다.』 ―연구원 봉급을 비롯해 연구소 경비가 적지않을텐데. 『연구원 봉급은 이곳 평균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처럼 제조업체 계열사인 연구소가 거의 없고 디자인회사로서 큰 편이어서 일이 다양해 재미있다고들 얘기한다. 연구소 경비는 전부 서울에서 가져오고 이중 3분의1이 인건비로 나간다. 그러나 작년 12개 모델에서 올해 23개 모델로 늘어난 생산량에 비해서는 경비증가율이 높지않다.』 ―디자인연구센터의 역할은. 『현재는 유럽시장이 주된 목표이다. 서울 디자인연구소의 유럽시장 팀이라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서울 연구소는 제품별로 팀이 만들어지지만 디자인연구소는 모든 제품을 망라한 유럽시장 팀인 셈이다. 그러나 점차 한국시장을 겨냥한 유럽형 디자인을 늘리고 있고 93년 일본 동경과 미국 뉴저지에 설립된 분소에 이어 조만간 싱가포르 분소까지 생기면 해외 연구기능의 중핵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본다. 건물 옆 남아있는 땅에 멀티미디어 연구소를 지어 디자인 소프트센터 또는 엔지니어링 소프트센터로 확대한다는 마스터플랜도 있다.』 생소한 아일랜드 디자이너들을 다스리기 힘들지않느냐는 질문에 심법인장은 『작년초 부임이후 두달정도 점심때도 샌드위치를 사먹으면서 일하니까 연구원들도 덩달아 점심시간에도 일하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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