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색슨이 '금융·석유'통해 세계 지배

■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윌리엄 엥달, 도서출판 길
세계1차대전·케네디 암살 뒤엔 '음흉한 세력'
美·英 '석유 전쟁'등 노골적 개입 갈수록 더해



암울하고 충격적이다. 이 책은. 세계 1차대전의 책임이 영국에게 있다니! 뿐 만 아니다. 석유파동도 미국과 영국 때문에 발생했단다. 이쯤 되면 반미(反美) 성향이 매우 강한 '불온 서적'으로 치부되기 십상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정교하고 치밀한 논거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을 좀 더 요약해보자. 케네디의 죽음과 드골의 실각, 이란의 호메이니가 주도한 회교 원리주의 혁명, 한국의 위환 위기. 난집합 같지만 그게 아니다. 한결같이 음흉한 세력과 연관이 있다. 앵글로 색슨. 아담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도 바로 이들이다. 신간 번역서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에서 저자 윌리엄 엥달은 자본의 변신과 전쟁에 얽힌 현대사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1차대전의 원인도 산업과 석유로 설명이 가능하다. 절대적 우위를 누렸던 제조업이 독일에게 밀리고 새로운 자원으로 석유가 부각되던 20세기 초반, 독일이 베를린과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해 에너지 직수입로를 확보하려고 시도하자 영국은 파산상태에서도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했다. 전쟁 동안 미국은 영국에게 세계 지배를 보장하는 세가지 수단을 배웠다. '전쟁과 금융과 석유.' 석유와 금융 자본은 미국의 돈이 유럽에 빠져나가는 현상을 법으로 막으려 했던 케네디 대통령이 부담스러웠고, 결국 그는 암살 당했다. 석유메이저의 독점구조에 거세게 저항했던 이탈리아의 석유 영웅 마테이도 여객기 사고로 죽었다. 독자적인 에너지 정책을 추구하던 드골 대통령도 결정적인 순간에 실각 당했다. 기득권 유지에 미국과 영국이 얼마나 집착했는지는 이란의 사례가 말해준다. 원유 판매 이익의 10분 1만 받던 이란의 모사데그 수상이 1953년 자원 국유화를 추진하자 영국과 미국 정보부가 합작한 쿠테타가 일어나 정권을 뒤엎었다. 이란에서 1979년 회교혁명이 발생한 것도 고분고분하던 팔레비 국왕이 자주화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시도해 석유자본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석유 자본은 심지어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까지 부풀리고 환경단체에 자금을 지원해 원전 건설의 싹을 잘랐다. 원전이 늘어나면 이익이 줄어드니까. 석유파동을 야기한 1973년의 4차 중동전 발발 5개월 전에 석유자본이 모여 유가의 4배 인상에 따른 국제금융의 틀을 미리 짰다는 점도 석유 메이저의 힘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1, 2차 석유파동에서 돈을 번 것도 산유국이 아니라 석유자본이었다. '영국과 미국의 세계 지배 체제와 그 메커니즘'이라는 부제가 딸린 책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간 대결의 역사도 담고 있다. 독일과 일본이 제조업으로 성장할 때마다 영국과 미국은 금융으로 짓눌렀다. 일본이 10년 장기불황에 빠지고 한국 등 동남아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도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앵글로 색슨의 의도가 깔려 있다. 제 3세계의 외채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이런 구조가 여전한 가운데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는 점. 미국와 영국의 간섭과 개입도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증거도 없이 대량살상무기와 테러 지원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도 이라크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개발 유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비주류 경제학자이자 언론인인 엥달의 현대사 추적이 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국제자본의 흐름과 각국의 사정, 정책에 관한 치밀하고 방대한 자료가 주는 설득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미국의 무자비한 석유정책에 대한 엥달의 논지는 엘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 최근 출간한 자서전에서도 증빙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대안이 없을까. 쉽지 않다. 저자는 '아주 느리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 함께 나누는 성장'에서 답을 찾는다. 하지만 그게 쉬울까. 19세기부터 세계를 지배해온 앵글로 색슨이 과연 나눔과 공존의 구조로 들어올 수 있을까.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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