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한 규제완화는 자칫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신호)을 보낼 수 있다. 여기에 경제수장의 비합리적인 판단까지 곁들여지면 결과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세계 금융위기의 발단이 된 ‘상품선물거래 현대화법’은 월가와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합작품이다. 지난 2000년 12월 당시 부시-고어의 대선 투표 결과에 세계의 눈이 쏠린 틈을 타 신속하게 미 의회에서 통과된 법은 신용파산스와프(CDS)를 비롯한 고위험 파생상품 거래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들끓는 반대의 목소리는 시장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그린스펀이 잠재웠다. 그는 1998년 7월 미 하원에서 “정부가 파생금융상품 시장에 개입하면 투자가들은 훨씬 더 위험한 행동을 하려 들 것”이라고 말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설 자리는 아예 없었다.
위기에 직면한 지금의 국내 현실도 비슷하다. 금융규제 완화에 대한 쓴 소리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세계 각국이 신자유주의적 금융 시스템의 한계를 인식하고 금융감독과 규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유독 우리 정부만 파생금융상품을 비롯한 금융규제 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선진국이 주춤하는 사이 금융산업이 도약할 수 있도록 규제완화의 호기를 놓쳐서는 안 되며 일관된 정책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시장의 목소리만 크다. 하지만 현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당장 내년 초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으로 금융파생상품의 족쇄가 풀리는데 향후 시장이 회복되면 전세계 투기세력이 선진국의 상품규제를 피해 상대적으로 느슨한 국내로 밀려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국내 파생금융상품은 외국계 상품의 복제품이 대부분일 정도로 의존도가 높다. 국내 CDS시장도 외국 회사의 설계로 만들어져 국내 금융기관이 주로 신용위험을 떠안는 구조가 많다.
최소한의 방어벽과 감독 시스템을 갖추지 않고 규제를 푸는 것은 투기세력에게 잘못된 신호를 전달하는 꼴이 된다. 전쟁사를 보면 힘이 약한 쪽은 전쟁에 앞서 들판의 곡식을 걷어들이고 성벽을 견고하게 하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전법을 썼다. 굶주린 군대가 한손접고 들어올 것이라 믿고 군량미를 깔아놓은 채 성문을 모두 열어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