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위 34도, 동경 125도.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 지점 수심 44m 바닥에는 한국 사회의 민낯이 누워 있다. 304명의 생명을 차가운 바닷속에 밀어넣은 세월호. 지난 365일간 우리의 화두는 '안전' 두 글자였다. 하지만 참사 이후에도 버스터미널·지하철·펜션·환풍구·요양원·아파트·텐트·다리 등 곳곳에서 재난은 반복됐다. 지난 1년간 사회 곳곳의 대형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만 수백 명에 달한다. 아무리 제도를 만들고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사회 저변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안전불감증'이라는 괴물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결국 '빈 독에 물 붓기'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지난 1년간 정부는 안전 강화라는 기치 아래 법과 제도·조직을 뜯어고치고 예산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앞다퉈 국회에 제출된 안전 관련 법안들만 240여건에 달한다. 지난해 11월에는 세월호 참사 때 초기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안전컨트롤타워의 부재 때문이라며 장관을 수장으로 한 국민안전처까지 만들었다. 해경과 소방, 옛 안전행정부의 안전 관련 인력을 한데 모아 1,000명 규모의 중앙조직이 육지와 바다·하늘을 아우르고 재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대형사고들은 정부의 대응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책과 제도가 실제로 안전의 최일선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의 생활과 의식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해 말에 국민안전처가 진행한 국민안전 체감도 조사에서는 '우리 사회가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은 22%에 그쳤다. 이는 세월호 직후였던 지난해 5월(16%)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참사 직전인 3월(32.6%)에 비하면 여전히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방재전문가인 조원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는 재난의 현장능력 강화를 강조했는데 현장은 곧 국민 개개인들"이라며 "안전에 대한 시민교육과 기초자치단체의 안전관리 역량 강화를 도외시한 중앙정부 중심의 안전정책은 공허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법과 제도 정비뿐 아니라 비어가는 곳간에도 안전예산은 대폭 늘렸다. 올해 안전예산은 중앙정부 14조7,000억원과 지방자치단체 4조8,000억원 등 모두 19조5,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중앙정부 안전예산은 지난해 12조4,000억원에서 올해에는 19.1%나 늘어 주요 예산 분야 가운데 증가율이 가장 높다. 담뱃값을 인상하면서 3,141억원의 소방안전교부세(담배소비세의 20%)까지 신설했다.
하지만 갑자기 늘어난 예산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크다. 연 15조원에 달하는 안전재정의 주먹구구식 집행을 막기 위해 국민안전처 내에 신설된 안전예산조직은 출범한 지 넉 달이 넘도록 태스크포스(TF) 수준이다. 안전예산TF는 중앙부처의 올해 안전과 관련된 400개의 사업예산에 대한 사전협의권을 갖는다. 안전예산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조직의 인원은 현재 7명이지만 정식 조직이 아니며 소방과 해경·연구관 등에서 파견을 나와 실제로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은 고작 3~4명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예산 관련 전문인력이 아니다. 국민안전처 관계자는 "부처 간 조율이 늦어지면서 예산TF가 정규 과로 자리 잡을지 아니면 사라질지 불확실한 상황"이라고 털어놓았다.
특히 안전예산의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질적인 면에서는 아직 바뀐 게 없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안전예산에서 도로 등 각종 인프라 시설들이 안전예산에 포함돼 있어 일종의 '허수예산'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올해도 여전히 이 같은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안전예산에 포함돼 있다. 윤명오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안전 강화를 위한 예산을 늘리는 것은 좋지만 단순히 숫자 목표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며 "건설 인프라 등과 관련된 예산은 안전에서 제외시키고 대신 이에 따른 유지·보수와 진단, 복원, 강화 등은 안전에 편입시키는 등 다단계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