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불씨' 박준채씨 별세1919년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은 누가 뭐래도 광주학생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11월3일 '광주학생운동'의 불씨를 던졌던 박준채(87ㆍ전 조선대대학원장)씨가 지난 7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통해 이번 기회에 당시 광주학생운동의 의미와 재판과정을 살펴본다.
당시 광주고보 2학년이었던 박씨는 그 해 10월30일 광주를 떠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학생 후쿠다슈조(福田修三ㆍ광주중 3년) 등이 사촌누나 박기옥(광주여고보 3년)씨의 댕기머리를 잡아 당기며 희롱하는 것으로 보았다.
박씨는 순간적으로 후쿠다를 내리쳤다. 이 싸움은 당시 객차에 있던 한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간의 집단패싸움으로 번졌다. 이날 벌어진 사태가 결국은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광주지역 학생ㆍ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주의 연구단체 인 '독서회'중앙본부가 주도하여 광주고보학생들의 가두시위 투쟁이 전개되어 광주지역 학생 전원이 가담하는 대규모 항일시위투쟁으로 발전했다.
항일에 대한 불길은 서울로 점화되고 이어서 전국으로 확산됐다. 경성제대를 비롯해 전국 194개교가 시위에 참가, 참가 학생들이 무려 5만4,000여명에 달했다. 학생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582명이 퇴학처분을, 2,330명이 무기정학을, 1,642명이 체포됐다.
검찰은 이 사건으로 104명을 치안유지법, 출판법, 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광주지법은 1930년 10월18일 김상환ㆍ송동식ㆍ조길용씨 등 광주학생운동의 주도단체였던 독서회 핵심 간부 3명에게 징역4년, 김보섭ㆍ윤창하ㆍ오쾌일ㆍ이신형씨 등 13명에 각 징역3년6월, 이형우 등 11명에 각 징역 3년, 정석규씨 등 25명에게 각 징역 2년6월, 안종변씨에게 징역 1년6월 이수동씨 등 16명에게 집행유예등 선고 하는 등 전원 유죄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또 같은해 10월27일 장재성씨을 징역 7년, 왕재일씨를 징역 4년, 장석천씨 등 4명을 각 징역 3년6월을 선고했다. 또 김몽길씨 등 29명에게 징역1년~7년 사이의 형을 선고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김상용씨등 88명이 재판에 불복하고 항소 했다. 항소심인 대구복심법원은 1931년6월13일 원심 형량을 다소 줄여 주었으나 유죄판결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 따라 장재성씨는 징역 4년, 김용섭ㆍ윤창하ㆍ오쾌일씨 등 7명은 징역 각 2년, 장석천씨등 3명은 각 징역1년6월, 나머지 최창규씨 등 77명은 각 장역1년을 선고 받았으며, 이중 문학연씨 등 8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고인이 된 박준채씨도 이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다.
광주학생운동은 전국 규모의 항일시위투쟁으로서 오늘날까지 그 정신이 이어져 오고 있다.
윤종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