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정부바라기 벤처캐피탈 업계


"금융위원회가 수조원 규모의 벤처 투자 계획을 밝혔는데 벤처캐피털 업계로서는 전혀 새로운 돈이 아니에요. 오른손으로 주던 것을 왼손으로 주겠다는 것이거든요"

최근 만난 한 벤처캐피털 사장은 정부가 쏟아낸 벤처지원 종합선물세트가 시원치 않다고 시큰둥했다. 그는 "이미 벤처에 투자하고 있는 연기금이나 금융 공기업 출자를 받아 펀드를 조성할 게 하니라 보험이나 대기업 등에서 새로운 돈이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방식의 지원정책으로는 업계가 살아날 수가 없다"고 언성을 높였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벤처투자 정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벤처캐피털 업계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각 부처에서 앞다퉈 조성하겠다고 하는 벤처펀드의 재원이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주된 이유다.

투자자 확대는 벤처캐피털 업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러나 벤처캐피털에 쏴주는 모태펀드 출자비율은 2006년 25.1%에서 지난해 38.4%로 오히려 늘었다. 모태펀드는 오롯이 정부 돈이다. 올 1ㆍ4분기에도 신규 출자자금 중 모태펀드 비중은 45.6%에 달했다. 투자자가 다양화하는 게 아니라 정부 의존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벤처 투자재원의 다양성을 높이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 금융기관이나 민간기업이 투자를 늘리지 않은 것은 시장 논리에 따른 판단이다.

'창조경제'를 주창하는 정부 정책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내놓는, 심지어 팔이 비틀려 토해 낸 자금은 다시 벤처캐피털 업계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이런 돈들은 과도한 안전장치를 요구하며 벤처 기업가들의 도전정신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또 연 7~8%에 달하는 최소 수익률(허들레이트)을 요구하며 모험자본 성향의 벤처캐피털을 소극적인 투자자로 전락시킨다.

우는 소리를 하면 정부가 돈을 구해다 대주는 방식으로는 벤처투자 생태계가 자라날 수 없다. 투자 저변을 넓히는 일까지 정부 보고 해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벤처캐피털 업계 스스로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자금을 끌어와야 한다. 그래야 돈이 되는 곳에 자금이 들어오고 이 자금이 더 큰 돈을 만들어내면서 벤처캐피털 곳간이 차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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