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별 인터뷰] 대한민국 새 국새 만든 민홍규 장인

"국새 찍을 때마다 나라 일 잘되길"
봉황 모양 손잡이에 훈민정음체 '대한민국' 새겨
"국새에 우리 민족의 문화와 힘 담아내고 싶었다"
봉황 작업땐 부정탈까봐 '날개 달린' 고기 멀리해


“이 국새를 찍을 때마다 국가의 뜻이 반드시 성사되기를 바랍니다. 새 정부 출범에 발맞춰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될 대한민국 새 국새를 만든 전통옥새 전각장인 민홍규(사진ㆍ52)씨는 새해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냈다. 그가 만든 국새는 이명박 당선자가 앞으로 외교문서 등 나라의 중요 문서에 국가의 상징으로 쓸 예정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4번째로 제작됐다. 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완성품을 인계 받아 새 정부 사용 전까지 비파괴검사 등 정밀한 감리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새 국새는 봉황 형태의 인뉴(印鈕ㆍ국새 손잡이)에 훈민정음체의 ‘대한민국’을 인문(印文ㆍ국새 글씨체)으로 하고 있다. 금 합금으로 완성된 국새에 들어간 순금만 무려 6kg에 달한다. 민씨는 “국새 하나만 봐도 한국의 문화적 안목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며 “특히 대한민국이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줄 수 있는 ‘힘 있는’ 국새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모든 획들이 직선의 움직임 속 미세한 굴곡이 있어 꿈틀거리는 생동감을 준다. 특히 세로획은 윗부분에 비해 아랫부분이 두터워 장중한 맛을 느끼게 한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많이 강조됐지만 지금은 강대국일수록 부족해 보이는 문화도 대단하게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문화와 힘의 논리가 함께 가는 시대에 살고 있지요.” 민씨가 이번 국새에 유난히 ‘힘’을 불어 넣고자 했던 배경이었다. 나라 일에 쓰이는 최고의 전통작품인 만큼 작업은 신성함 그 자체였다. 전체 제작과정은 주로 경기도 이천 작업장에서 이뤄졌지만 금을 주물하고 다루는 과정만큼은 경남 산청에서 진행됐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끝자락으로 사람 몸에서 가장 중요한 요추(腰椎) 부분에 해당한다. 작업장 주변에는 천왕봉에 맺혀서 끝나는 왕산과 필봉(筆鋒ㆍ붓끝)산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국새 작업의 일부가 붓을 다루는 것인 만큼 절묘하게 자연지명까지 국가적 대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국새는 밀랍에 조각을 한 후 진흙을 붙여 구워낸 거푸집 안에 금물을 부어 만든다. 여기에 들어간 금값만 2억5,000만원에 달한다. 또 조각의 디테일까지 잘 살려내면서 굽는 동안 금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내화력과 결속력이 뛰어난 산청의 고령토를 사용했다. 민씨는 “1년의 제작 시간 내내 금이라는 죽은 생명체에 생명을 일깨우기 위해 늘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과 믿음을 끊임없이 우려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일화 하나. 민씨를 도와 작업장에서 일을 한 이들은 지난 1년 간 닭ㆍ오리 등 ‘날개 달린’ 고기에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봉황을 만드는 작업 때문에 음식 하나에도 민씨의 엄격한 ‘원칙’이 적용됐다. 현재 참여정부가 쓰고 있는 3번째 국새의 경우 1998년 김대중 정부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의뢰, 현대적 제작방식으로 만들었지만 완성 단계에서 이미 국새에 미세한 금이 가고 글자체도 완전한 직립이 아니어서 마모가 될수록 글자의 면적까지 달라지고 있다. “현대적 기법으로는 금을 녹인 물이 골고루 스며들 수 없는 데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포가 생겨 국새의 균열을 초래하게 됩니다”. 결국 정부는 4번째 국새 제작에 다시 전통 장인의 손을 빌리게 되었다. 민씨는 국내는 물론 국새 문화권인 중국ㆍ일본ㆍ한국, 3국에서도 전통기법을 바탕으로 국새를 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새인 대한제국 국새를 만드는 데 참여했던 석불 정기호(1899~1989) 선생과 68년 사제의 연을 맺고 옥새전각 기술을 사사했다. 국가기록원은 1610년 광해 2년 이엇금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조선 옥새전각 장인의 계보를 근ㆍ현대에 접어들어 황소산-정기호-민홍규로 인정하고 있다. 행정자치부는 이번 국새 제작을 위해 ‘인뉴’와 ‘글씨’를 맡을 장인을 따로 공모했지만 민씨가 낸 작품이 두 부문 모두에서 당선됐다. 행자부조차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는 후문이다. 인뉴 부문의 당선이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글씨’ 부문에서조차 내로라하는 국내 서예가들의 작품을 물리치고 당선됐다는 점은 국새 장인으로서 그가 갈고 닦은 실력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민씨는 “여섯살 때부터 조부께서 일주일에 50수씩 한시를 외우게 하고 사서삼경과 주역 등 동양학과 문자학을 가르쳤다”며 “한번 설명할 때 알아들어야지 못 따라오면 바로 목침이 날아들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국새를 만드는 한국의 장인들은 예외 없이 학문으로 연마한 인격과 철학을 동시에 갖췄다고 한다. “새 정부가 좋은 일로도 새 국새를 찍겠지만 혹여 어쩔 수 없는 일로 찍더라도 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론이 나야죠.” 인터뷰 마지막까지 그는 새 국세에 이 같은 간절한 바람을 녹여냈다. ● 국새, 어떻게 변해왔나?
전통기법으로 복원 4번째 국새…올해가 영속성 '원년' 돼야
나라 도장인 국새의 변천사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순탄치 않았던 역사의 수레바퀴만큼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민홍규 선생이 순수 전통기법으로 새롭게 복원한 네번째 국새가 사용되는 올해가 국새의 영속성을 함께 약속하는 '원년'이 됐으면 하는 게 전통장인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국가 중대사에 늘 함께 했던 국새는 그러나 그 제작과정과 국새 형태와 관련한 창작 배경 등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많다. 모두 정부의 안일한 국새 관리에서 비롯됐다. 지난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만들어진 대한민국 1호 국새는 이후 1962년 12월31일까지 사용됐으나 2차 국새가 사용되면서 홀연히 사라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국새가 찍힌 흔적인 '인영(印影)'만이 관인대장에 남아 있어 그 모양을 추정할 뿐이다. 용ㆍ거북ㆍ봉황 등 신령한 동물(靈獸)의 형상을 손잡이로 썼을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두번째 국새는 1963년에서 1999년까지 35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사용됐다. 군사정권의 강압통치, 압축성장의 기적을 이루며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경제 발전,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 지켜봤다. 다행히 1호 국새와 달리 현재 국가기록원에 원형이 잘 소장돼 있다. 은 재질로 만든 이 국새는 손잡이가 거북 모양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구체적인 제작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제조공법 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세번째 국새는 김대중 정부 시절 2차 국새의 글씨체가 많이 닳아 제작됐다. 18k 금으로 제작한 것으로 처음에 용으로 인뉴를 새기려 했다가 "용은 서양에서 악마를 상징한다"는 종교단체 등의 반발로 봉황을 선택했다. 이 역시 균열 문제가 발생, 참여정부 임기 종료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된다. 민씨가 제작한 봉황 모양의 국새는 오는 2월까지 정부 연구기관인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정밀한 품질검사를 거쳐 이명박 정부에 납품된다. 1년의 제작기간 동안 전통 국새제작 기법이 적용된 만큼 2차 국새보다 뛰어난 내구성으로 오랫동안 사용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행자부에 따르면 영국의 경우 여왕이 바뀔 때마다 새 국새를 만들지만 우리는 별도의 교체기간을 설정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네번째 국새 사용을 위해 대통령령인 '국새규정'을 개정하고 새 국새를 관보에 게재하는 등 남은 법적 절차를 곧 완료할 예정이다. ◇약력 ▦1955년 경남 산청 ▦서라벌고 ▦1970년 석불(石佛) 정기호 문하 입문, 조선옥새 전각 등 사사 ▦1987년 조선옥새 전각장 전수자 인증, 아호 '세불(世佛)' 지정 ▦1998년 고종시대 소실 옥새 5과 복원 ▦1999~2002년 조선시대 옥새 복원 ▦2001년 옥새전각 경기도 명장 선정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대한국새 복원 ▦2006년~현재 행정자치부 국새제작단 단장 ▦세불옥새전각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