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에서 중소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A사장은 요즘 죽을 맛이다. 경기 악화로 수출도 막히고 내수도 꽁꽁 얼어붙어 생산가동률이 50%도 안 되는 상황에서 원부자재ㆍ소모성자재 등의 구매비용은 더 늘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어서다. 전체 기업비용 중 80% 이상을 차지하는 구매비용을 줄여야 하는데 최근 원자재 가격의 급격한 상승까지 겹쳐 현상 유지조차 쉽지 않다.
그는 "경영 사정이 좋지 않아 원가절감과 구매 프로세스 개선을 위해 대기업 '소모성자재 구매대행MRO'과 계약을 검토했으나 사업조정 합의 대상이 아니라고 거절당했다"며 "생산에 집중해야 하는 중소 제조기업은 불이익을 받고 중소 유통상의 배만 불리는 이런 구조가 가당한 것이냐"고 역정을 냈다. A사장은 "이런 상황에서 구매비용이 비싼데도 중소 유통상에게 납품 받아야 하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외 경기침체로 가뜩이나 힘든 중소 제조기업이 MRO사업조정 이후 구매비용 증가 등으로 경영난이 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기업은 MRO 조정으로 구매비용이 10~15%가량 늘어나 심각한 채산성 악화를 겪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중소기업 중 비중이 얼마 안 되는 중소 유통상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실시한 사업조정이 되레 대다수 중소 제조기업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꼴이다. 정치적 명분과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날림으로 시행한 사업조정이 결과적으로 제조업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다수의 편익을 훼손한 셈이다.
실제로 중소기업청은 2011년 소상공인으로 구성된 한국산업용재협회ㆍ한국베어링판매협회단체연합회와 대기업 MRO 4개사 간의 사업조정 자율 합의를 이끌어냈다. 사업조정의 주요 골자는 기업 납품 중소 유통기업의 유통마진을 보장하기 위해 중소기업법상 중소 제조기업에 대해 대기업 MRO의 신규 영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제조업체는 소모성자재를 중소 유통상에서만 사서 쓰라고 한 것.
이에 따라 MRO 대기업은 중소업체를 상대로 한 사업을 중단하게 됐고 대신 중소 유통기업은 제조기업과의 납품 거래선을 확대하는 등 생존권을 보장 받게 됐다. 문제는 중소 제조기업이 기존의 대기업 MRO를 통해 얻은 물류센터 공유, 공동구매에 따른 구매비용 절감 등의 혜택을 모두 잃게 됐다는 점이다.
대기업 MRO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제조업체는 효율적인 자재 구매를 위해 전문인력을 채용, 직거래를 모색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특성상 적은 구매물량으로 오프라인 유통상과 개별 품목 거래를 하다 보니 단가는 높아지고 수작업 업무가 늘어 구매효율성이 오히려 떨어져버렸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정부 당국자들이 중소유통상이 중소기업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며 "제조업체에 대기업 MRO나 중소유통상은 둘 다 유통업체일 뿐"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인력과 자본이 없는 우리 중소기업에는 대기업 MRO와 공동구매를 통해 구매원가를 절감하는 것이 개별 중소기업이 물품을 직접 구매하는 것보다 더욱더 효율적이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MRO 사업조정이 중소 제조기업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이유는 중소 유통기업이 여전히 고비용의 오프라인 시스템을 쓰는 등 효율성이 낮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유통망은 대형 메이커의 지역 대리점 형태로 구축돼 자사 제품 판매가 대부분이다. 이에 따라 우수 제품을 개발한 중소기업이 기존 대리점 유통망에 끼어들기가 쉽지 않아 가격경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아울러 중소 MRO에서 소모성자재를 사다 쓰는 업체뿐만 아니라 과거 MRO 대기업에 납품하던 중소기업도 울상이다. 유통 중소기업의 가격 공개시스템이 투명하지 않아 헐값납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일부 제조기업은 납품처 확보를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저가) 공급을 하고 있다"며 "또 (대기업 MRO와 달리) 중소 유통상과 오프라인 구매를 하면 거래 담당자와의 인적 친분이나 영업활동이 필요하지만 영업 기반이 없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이마저도 쉽지 않은 실정"이라고 답답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