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출발했어? 여기 ○○공인중개사무소인데 오늘 보기로 한 집 안 되겠네. 오지 말아요."
"네? 왜요?"
"집주인이 전세자금 대출하는 사람은 안 받는대."
"아니 왜요?"
"집주인이 귀찮대. 은행에서 확인전화 오고 그러니까."
길고 길었던 월세 생활과 작별하겠다는 부푼 꿈에 쩍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전세물건이 희귀한데다 대출을 끼고 마련한 전세금도 적어 구하기 어려울 거라 짐작은 했지만 '집주인'이 복병이 될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대다수 집주인들이 전세자금 대출을 하는 세입자를 원치 않는다니….
이 월세방에서 저 월세방으로 옮겨 다니며 지낸 서울살이 8년, 직장생활 3년. 다달이 나가는 월세도 모으면 큰돈이라는 생각에 전셋집으로 이사하자는 결심이 섰다.
집 구하기의 첫 단계는 '직방'이나 '다방' '네이버 부동산' 같은 부동산 애플리케이션과 '피터팬의 좋은방구하기'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시세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1인 가구가 살 만한 원룸이나 전세는 대략 6,000만~8,000만원선. 그동안 모은 돈 3,000만원으로는 턱도 없는 금액이다.
은행 상담 끝에 추가로 필요한 3,000만~4,000만원은 전세자금 대출을 받기로 했다. 기자와 같은 20대 후반의 근로자를 위한 전세자금 대출은 주택금융공사나 국민주택기금의 보증으로 시중은행에서 전세 보증금의 70%까지 대출받을 수 있었다. 무주택, 연소득 5,000만원 이하 등 조건을 충족해야 해야 하는 대신 대출금리는 연 3.3%~4.5%대로 저렴한 편이다. 내친김에 살고 있는 집주인에게는 오는 10월에 나가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지난 8월 중순부터 밤낮 가리지 않고 마포 상암동과 망원동·합정동부터 서대문구 홍은동과 중구 신당동·장충동, 중랑구 면목동, 송파구 둔촌동 등 서울의 몇 안 되는 전셋집을 이 잡듯이 뒤졌다.
며칠 발품을 판 끝에 가까스로 발견한 마음에 드는 집은 상암동에 있는 분리형 원룸이었다. 주변이 아파트라 조용하고 지하철역과도 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괜찮네요. 계약서 쓰고 전세자금 대출 받는 거죠?" "아이고 전세자금 대출 받을 거야? 그럼 얘길 미리 하지. 여기는 주인이 허락 안 해줘요." "네? 왜요? 제 신용으로 받는 대출인데 집주인이 무슨 상관이에요?" "700만원인가 세금을 안 냈어, 주인이. 가져가 봤자 은행에서 퇴짜야."
전세자금 대출을 받으면 은행에서 실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형문 우리은행 여신정책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일단 임차인이 전세계약서를 가지고 은행에 오면 은행에서는 직접 현장에 가서 집이 진짜 있는지, 불법 개조한 집은 아닌지, 집주인과 세입자 간에 계약은 확실히 됐는지를 확인합니다. 혹시 한 집에 다중계약을 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집주인이 동사무소에 가서 전입세대열람내역을 떼어와야 하고요." 그는 "1인 가구가 살 만한 원룸이나 작은 방이 있는 건물들은 구조변경을 하는 경우가 많아 아마 전세자금 대출이 더욱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집들도 이 같은 결격사항이 한두 가지는 있었다.
주로 불법 구조변경이었다. 망원동에 있는 7평짜리 신축 원룸은 옥상에 지어놓은 옥탑방이 불법건축물이라서, 합정동에 있는 또 다른 원룸은 등기부등본상 '근린생활시설'이어서 전세자금 대출이 안 된다고 했다. 은행에서 받을 수 있는 근로자전세자금 대출을 보증해주는 주택금융공사에서 확인한 결과 전세자금 대출은 주택이라고 명시된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몇 차례 헛걸음을 한 뒤 기자는 아예 다음부터는 공인중개사와 통화할 때 전세자금 대출을 받을 거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러자 보러 갈 만한 집이 거의 없어졌다. 강북구 미아동에 원룸 매물을 다량 보유했다는 한 공인중개사는 "확실히 말하면 이 근처에서는 전세자금 대출로 집 못 구한다"라는 깔끔한(?) 답변을 내놓았다.
10월에 나간다는 선언을 취소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삼선동에 전세자금 대출이 되는 집이 있다는 전화가 왔다. 기쁜 소식에 퇴근 후 한달음에 가봤다.
언덕배기에 있는 20년 된 주택이었는데 각각 대여섯 평은 돼 보이는 널찍한 방이 무려 3개였다. 3인 가족이 살던 집이라고 했다. 공인중개사가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가 찾는 금액대나 크기가 애매해요. 학생들이 사는 작은 방이나 가족이 사는 큰 집이나 둘 중 하나예요."
기자가 체험한 1인 가구 전셋집 구하기는 이렇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저금리 시대에 목돈 굴릴 데가 없는 집주인들이 월세를 선호하는데다 그나마 나온 전세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실제로 한국개발연구원이 지난달 11일 발표한 2·4분기 부동산 시장 동향분석 자료에 따르면 전셋값은 전국적으로 1년 전보다 4.4% 올라 2·4분기 주택매매 가격 대비 전세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경기 6.8%포인트, 대구 6.4%포인트, 서울 5.8%포인트 순으로 상승폭이 컸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가뭄에 콩 나듯 발견하는 전셋집마저 전세자금 대출이 어려워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1인 가구, 그중에서도 목돈 없이 집을 구하는 20대 후반~30대 사회초년생들이 전셋집을 구하기 어려운 가장 현실적인 이유였다.
변창흠 세종대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전세자금 대출이 가옥주의 허가가 필요 없는 신용대출임에도 집주인이 사실상 허가하는 상황은 문제가 있다"며 "귀찮아서 전세자금 대출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권유린이나 마찬가지"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변 소장은 "세입자가 집을 구하기도 전에 필터링되는 이 같은 현상은 가옥주의 재산권을 중시하고 세입자의 주거권을 경시하는 우리나라 주거문화의 단면"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