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2월6일] 알두스


직지심체요절 1377년, 구텐베르크 1450년. 한국의 금속활자는 서양을 훨씬 앞선다. 구텐베르크보다 216년 빨랐다는 기록도 있다. 기술과 문화의 척도라는 금속활자를 갖고도 우리는 왜 서구에 뒤졌을까. 대중화와 상업화에 이르지 못한 탓이다. 알두스(Aldus Manutius)가 아니었다면 서양 역시 동양과 비슷한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구텐베르크 인쇄술도 초기에는 성서를 찍는 데 국한됐었으니까. 성직자와 학자의 전유물이던 인쇄물을 대중화한 주인공이 바로 알두스다. 1449년 이탈리아 테오발도에서 태어난 그는 학자 출신. 라틴어를 배우고 그리스 고전을 연구했다. 마침 연구환경이 어느 때보다 좋았다. 비잔틴제국 멸망(1453년)으로 옛날 서적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고전의 바다를 만난 알두스는 출판하기로 작정하고 1494년 베네치아에 ‘알디네(Aldine) 출판사’를 차렸다. 운도 좋았다. 초기작인 ‘로마의 군제’는 1500년까지 99쇄를 거듭하며 부와 명예를 안겨줬다. 알디네출판사 간행물은 무엇보다 품질이 뛰어났다. 비잔틴제국에서 망명한 학자와 전문가들에게 실무를 맡긴 덕이다.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과 대화록을 구상하고 자료를 모은 것도 알두스의 저택에 머물던 시절이다. 알두스는 책 크기를 행낭에 들어갈 정도로 맞추고 읽기 쉬운 알두스체(이탤릭체)도 만들어냈다. 알디네출판사는 알두스가 1515년 2월6일 56세로 사망한 후에도 1597년 문을 닫을 때까지 908권의 양서를 찍어냈다. 문장의 마침표와 인용부호도 처음 선보였다. 규격화한 책자와 아름다운 서체, 마침표 등의 도입은 지식의 전파속도를 배증시키고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다. 동서양의 역전은 구텐베르크보다 이 사람 때문이었다. 알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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