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7월3일] 마리 드 메디시스


금화 60만 크라운. 25세의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s)가 22년 연상인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에게 바친 지참금이다. 금융업으로 이룬 부를 바탕으로 피렌체를 지배하고 교황 두 명을 배출한 친정 메디치 가문이 들려보낸 지참금은 프랑스 역사상 최고액으로 꼽힌다. 헤아리는 데만 두 달이 걸렸다. 재정을 정비하고 종교내전으로 분열된 국론을 통일시켜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앙리 4세가 첫번째 왕비와 이혼하고 마리를 택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식탐(食貪) 탓인지 비만에 가까워 ‘뚱뚱한 이탈리아인’으로 불렸던 마리는 돈뿐 아니라 요리사도 잔뜩 데리고 시집왔다. 프랑스 요리가 바로 ‘마리를 위한 특별 요리’의 현지화 과정에서 나왔다. 마리는 결혼(1600년) 후 9년 동안 3남3녀를 낳았지만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명군이었으나 끊임없이 새로운 여자를 찾았던 앙리 4세의 바람기 탓이다. 앙리 4세의 암살(1610년) 직후에는 왕비가 배후라는 설까지 돌았다. 여덟 살짜리 장남이 루이 13세로 등극하자 섭정을 맡은 마리는 이탈리아 출신 귀족만 중용하는 등 국정 전횡을 일삼았다. 모후 마리는 갈수록 민심을 잃었다. 성년이 된 루이 13세가 1617년 친정을 선언하자 반란을 일으켜 1630년까지 아들을 괴롭혔다. 결국 프랑스에서 추방된 마리는 자식들을 찾아 네덜란드와 영국을 전전하다 1642년 7월3일 쾰른에서 67세로 생을 마쳤다. 모두가 경원하고 돈도 떨어진 마리를 마지막까지 돌봐준 사람은 화가 루벤스. 과거에 후원 받았던 은혜를 갚은 루벤스는 마리를 위해 24점의 작품도 남겼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마리의 육신은 벌써 흙이 됐지만 루벤스의 그림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예술은 세월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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